<중국, 중국인>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신화“장위포도주”
<중국, 중국인>실패와 성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신화“장위포도주”
  • 한인희
  • 승인 2011.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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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포도주의 아버지, 장삐스(張弼士)<하>

남양(南洋)에서 거부가 된 장삐스는 고국, 중국을 잊지 못했다. 그리해 그는 조국에 돌아가 실업발전에 투신하고 싶었다.
더욱이 이를 기회로 국내에서 정치적인 지위도 획득해보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비록 남양에서 큰 부자였지만 중국 대륙의 청나라 조정의 관리들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가 국내에 실업발전을 위해 공장을 설립하려는 염원이 있었지만 이를 열어줄 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서 바라는 바는 반드시 한 번의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1890년 청정부의 고관이었던 주영국 흠차대신 꽁짜오위엔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귀국 길에 남양을 들렸다.
장삐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고관 꽁짜오위엔을 접견할 수 있었다. 콩짜오위엔은 장삐스를 접견한 뒤 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특히 장삐스가 사업에 대한 뛰어난 전략과 업무 처리의 신속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혜롭게 사람을 대하는 관용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꽁은 그를 청 조정에 추천했고 청조정은 그에게 청정부의 공식 관직을 수여했다. 그 직책이 바로 ‘대청국 주말레시아 페낭의 초대 영사’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관료의 길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워 1894년에는 주 싱가폴 총영사로 승진했다.
그의 관직은 남양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8년 당시 중국의 권력의 최고 실세였던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리훙장은 그를 위에한철도(광둥과 우한을 다니는 철도)의 방판(幇辦)에 임명했고, 다음 해에는 총판(總辦)으로 승진시켜주었으며, 1900년 마침내 위에한 철도의 독판(督辦)에 임명했다. 그는 몇 년 사이에 관직이 계속 오르고 정부로부터 능력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제 청 조정에서 그를 접견하기에 이른다. 황제와의 만남이었다. 1903년 그는 두 차례 황제를 접견했다. 그리고 그에게 시랑(侍郞:차관급)직급이 수여됐다.
이른바 ‘3품 당상관’의 후보가 된 것이다. 다음해 10월 그는 세 번째 청조정의 부름을 받았고 마침내 ‘경제진흥 12개조’를 황제에게 건의했다. 청조정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관직도 1품의 고위 관직을 제수 받고, 태복사정경(太仆寺正卿:흠차대신에 해당함) 대신이 됐다. 그리고 외국과 통상을 담당하는 상무대신과 페낭의 관학대신을 맡기도 했다. 1907년 4월 장삐스는 독판철로대신에까지 임명됐다. 장삐스는 청정부의 명령을 받고 남양으로 돌아온 뒤 페낭에서 중화총상회(中華總商會)를 조직했다.
그렇다면 장위포도주회사를 만들게 된 과정은 어떠했는가? 1891년 장삐스는 청정부의 철도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대관료 성쉬엔화이(盛宣懷)의 초청을 받고 옌타이에서 철도 건설에 관한 업무를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장삐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옌타이 지역을 샅샅이 조사했다.
이 때 그는 이전에 프랑스영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즉, “당시 영불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할 때 나도 그 일원이었소. 프랑스군은 텐진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나와 동료들은 함께 옌타이에서 많은 야생포도를 따가지고 부대로 돌아왔지요. 군인들이 가지고 다니던 작은 압축기로 포도즙을 내니 향기가 순하고 술의 질이 프랑스의 브랜디에 버금갔어요. 당시 프랑스 군인들의 소원은 중국의 열강에게 영토를 분할할 때 프랑스는 반드시 산둥지역을 쟁취해야한다고 주장했답니다. 왠지 아세요? 이곳 옌타이에 포도주 양조장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장삐스는 이 말을 되새기며 유럽인들이 수 천년의 포도주 생산경험으로 볼 때 양조할 수 있는 포도를 재배할 장소는 반드시 옌타이라고 생각했다. 옌타이는 뒤에는 산이 있고 바다에 임해있는 지역으로 겨울에는 엄동이 없고, 여름엔 혹서가 없는 기후를 가진 곳에다가 포도가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갖고 있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도가 자라는데 가장 좋은 배산임해(背山臨海)의 길지였다. 그는 즉각 이곳에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회사명을 ‘장위포도양주회사’로 했다. 장위포도주회사의 허가증은 물론 3년간의 면세를 허락받았고 15년간 독점 생산의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됐던 것이다. 장위포도주회사는 일순간에 기세가 충천했다. 장삐스는 매력적인 실업가였고 치밀하고 재주가 많은 장사꾼이었다.
포도주는 서방의 전통적인 생산품이었다. 따라서 장위포도주는 최대한 빨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해 높은 수준에서부터 서방의 경험을 배우는 지름길을 선택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시험재배하고 육종을 중국 토지에 적응시켜 여러 차례 선택과 도태를 반복한 뒤 마침내 중국 내 가장 유명한 포도기지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장위 포도주 회사가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됐다.
1894년 장삐스는 이 회사에 300만 냥의 백은을 투자했다. 옌타이의 두 곳에 천여무의 황무지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입한 120여종 이상의 다양한 포도품종을 심었고 거대한 포도밭을 가꾸었다. 그리고 그는 압축기, 증류기, 발효기 오크통 등 양조에 필요한 설비들을 들여왔고, 국내외에서도 유명한 지하 포도주 저장고를 설치했다. 그리고 거금을 주고 유럽의 일류 소믈리에(Sommelier)를 초빙했다.
그들은 모두 포도주를 대대로 만드는 명문 집안 출신들이었다. 이들로부터 체계적으로 명주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중국 최초의 현대적 과학기술을 채용한 포도주 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포도주 저장고가 섭씨 11도를 맞추어 아시아에서 유일한 지하저장고를 갖추었다.
와인을 저장하는 오크통의 재질의 선택, 처리, 제작은 엄격하게 전통적인 공예의 기술에 따라 진행했다. 장위포도주 회사는 설립으로부터 10년을 거치면서 3차례 새롭게 변신했다. 여러 차례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장위포도주회사는 마침내 크게 성공했다.
그들이 주조한 술 빛은 아름다웠고 향기는 사람들의 코를 자극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시작했다. 1912년 국부 쑨중산 선생은 이 회사에 ‘품종예천(品重醴泉)’이라고 글을 써주었으며, 캉요우웨이(康有爲)는 축하시를 보내주기도 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1915년 장위포도주는 ‘파나마만국박람회’에서 일거에 4개의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는 중국의 포도주가 최초로 해외에서 평가를 받은 것이고 국내외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갖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장위포도주가 ‘중국혼의 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계기가 됐다. 오늘날까지 장위포도주는 판매량이 가장 좋은 술이 됐다.
 장위포도주는 중국 포도주업계의 유일한 유명상표에 올랐다. 장삐스는 평생을 사회복지 사업에 진력했다.
당시로서는 거액인 10만 銀圓을 출연해 사회 복지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특히 그가 해외 상무대신 겸 페낭의 관학대신을 했을 때 8만원을 내서 페낭중화학교를 설립했으며, 다시 싱가폴에 잉신(應新)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홍콩대학에도 10만원을 출연했고, 신해혁명 이후 그는 복건에 7만원을 출연했으며 광둥의 산터우(汕頭)에는 수십 곳에 육선당(育善堂)이라는 복지시설을 설립하고 전문적으로 현지 주민들의 구휼사업을 도왔다.
말년에는 광저우의 중산(中山)대학과 링난(嶺南)대학에 학교 건물을 지어주었으며 현재 중산대학의 ‘장삐스루’가 그를 기념하고 있다. 그는 1916년 9월 12일 자카르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체는 페낭, 싱가폴, 홍콩을 거쳐 고향 따푸에 안장됐다. 그의 유체가 지나는 연도의 영국과 네덜란드 식민지정부의 건물에는 그를 애도하는 조기를 내걸었다. 그의 유체가 고향 따푸에 도착했을 때 당시 국민정부는 광동성성장 주칭룬(朱慶潤)을 파견, 그를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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