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중국인>중국과 포도주의 인연 그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중국인>중국과 포도주의 인연 그로부터 시작된다
  • 한인희
  • 승인 2011.01.24 00:00
  • icon 조회수 18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포도주의 아버지, 장삐스(張弼士) <상>

중국 CCTV를 보고 있노라면 산둥 옌타이(烟台)의 포도주회사 장위(張裕) 광고가 매우 독특하다.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을 등장시키면서 이 회사를 만들게 된 한 중국인을 소개한다. 그가 바로 청대의 남양 화교였던 장삐스라는 인물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술을 이야기 하면  ‘남황북백’이었다. 북쪽은 빠이주(白酒), 남쪽은 황지우(黃酒)라는 의미다. 그런데 언제부터 초대 자리에 가면 중국에서도 홍지우(紅酒)인 포도주가 연회의 핵심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아직도 한국인들은 바이주의 도수 높은 술을 즐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포도주 생산국으로서 중국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개인적인 선입견인가?
그러나 중국은 2012년 전 세계 7대 포도주 소비국이 될 것이며, 소비량의 증가는 36%로 10억병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1.5명당 1병꼴이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썬전과 청두가 포도주 최대 소비도시이고, 프랑스가 중국시장의 최대의 공급처이다. 참고로 자료에 의하면 2008년부터 2012년 전 세계 포도주 생산량은 30.22억 상자에 달했으며 이 양은 세계 인구 두 명당 한 상자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 가운데 절반이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에서 소비된다. 장위를 포함한 산동의 옌타이 지역의 포도주 생산량은 년간 70만 3천 7백 리터로 전국 포도주 생산량의 40%를 점하고 판매 수입은 70억 3천 7백 위안(한화 약 1,230억)으로 장위, 웨이룽(威龍), 장청(長城) 등이 모두 10위 안에 드는 회사이다.
장삐스는 중국 포도주 공업 생산의 선구자이자 중국포도주 공업 역사에서 가장 의미있고 특별한 인물이다. 1892년 옌타이(烟台)에 장위포도주회사를 설립하고 옹기로 된 술 단지를 서양식의 오크통으로 바꾼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유럽의 우수한 포도품종을 중국에 들여와 순수하게 포도밭을 가꾸기도 했다.
특히 유럽의 현대 양조기술을 채용해 우수한 포도주를 생산해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 중국에서 포도주 생산은 타이위엔, 칭다오. 베이징, 통화 등에서 현대화된 포도주 공장들이 설립된 것도 모두 장삐스의 역할이 크다. 한편 장삐스는 19세기말 중국 화교들이 어떻게 치부하고, 어떻게 권력과 결탁하는지를 보여준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장삐스란 어떠한 인물인가? 한사위엔(韓山元)이 쓴 <초기 남양 중국인 중 최고의 부자, 장삐스(早期南洋華人首富張弼士)>(聯合早報, 2001. 12. 24)라는 글을 보자. “그는 백여년 전의 남양의 화교 중에 가장 돈이 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재력이 당대의 최고의 부자 린샤오랑(林紹良)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 인도네시아, 페낭, 싱가폴과 인연이 깊었다. 그가 싱가폴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일은 바로 1905년에 중화총상회(中華總商會)를 조직하고 화교사회의 최고 기관을 탄생시키게 했던 일이다.” 그는 결국 동남아 화교로 이곳에서 거대한 부를 쌓은 인물로 화교사회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의미다.
그의 본명은 쩐쉰(振勳)이었고, 호는 짜오비엔(肇燮)으로 남양에서 명성을 얻게 되자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 ‘장삐스’로 불렀다. 그는 1841년(일설에는 1840년) 12월 21일 광둥성 따푸시엔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장란시엔(張蘭軒)으로 사숙에서 훈장 겸 한의사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장삐스는 부친으로부터 3년간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18살이던 1858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가게 됐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뒤 그는 지물포에서 염색 직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열심히 일한 뒤 직급도 오르고 고용주의 신임을 얻게 됐다.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마침내 지물포의 사위가 됐다. 이제 직공이 아니라 점포를 함께 운영하는 경영자의 신분이 됐다. 장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이 직접 가게를 열게 됐는데, 술가게였다.
그는 이렇게 하여술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의 가게는 각국의 명주들을 수입해 판매했다. 그는 이러한 사업을 통해 해외의 경영의 비법을 깊이 깨닳게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당국의 관리들과 연계를 가졌다. 정치권력과 기업이 결탁한 것이다. 이를 통해 주세와 전당세를 독점했고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섬 한곳의 아편세를 독점적으로 관할했다. 이를 통해 그는 돈벼락을 맞았다. 그는 매우 기민하고 능굴 능신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권력의 변화에 특히 민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용과 인자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삶에 인화가 주요한 덕목이 됐다. 이러한 점이 그의 사업을 더욱 크게 성공하는 밑바탕이었다. 자본금만 800만 길드로 억만장자가 됐다.
이제 그는 중국 포도주 사업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1871년 어느 날 장삐스는 자카르타의 프랑스 영사관이 개최한 파티에 참석했다. 여기에서 처음 마셔본 프랑스의 고급 포도주는 그의 입맛을 사로잡고 말았다. 이에 대해 그는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충격이었고 멈출 수 없는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파티에서 프랑스 영사는 중국 대륙의 옌타이 등지에 가보면 산 전체에 야생포도가 지천이라는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러면서 그는 이 포도로 양조한 포도주의 맛이 특별나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그냥 아는 것을 자랑하는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장삐스는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겨두었다. 이때부터 장삐스의 마음속으로 반드시 포도주회사를 설립해야겠다는 염원을 갖게 됐다.
1866년부터 장삐스는 인도네시아에 위화개간회사(裕和墾殖公司)를 설립하고 대규모로 황무지를 개간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계속하여 황무지 개간 사업에 뛰어들었다. 1875년 수마트라에 아체개간회사(亞齋墾殖公司), 1877년에는 이리 지역에 위싱개간회사(裕興墾殖公司), 1878년에는 자바의 욕자카르타에 장야오시엔(張耀軒)과 합작으로 리왕개간회사(笠旺墾殖公司)를 설립해 황무지를 개간해 커피와 차를 재배했다.
이들 개간회사는 직공이 수천명이었다. 개간업을 바탕으로 그는 은행업까지 진출했다. 더 나아가 윤선회사도 차렸다. 1886년 페낭에 만위싱윤선회사(万裕興輪船公司)를 설립해 배 3척을 구매해 페낭과 아체를 오고가며 승객을 실어날랐다. 윤선회사에 대해서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1898년 자카르타에서 싱가폴로 업무 차 갔다가 독일우편윤선회사가 중국인을 멸시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고 1등 칸 표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이 독일회사는 그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표를 팔지 않았다. 그런데 그와 동행한 호주국적의 첩은 백인이라는 이유로 1등 칸 표를 파는 것을 보고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앞으로) 나의 선박에는 모든 독일인에게 절대로 표를 팔지 않을 것이다”라고 소리 질렀다.
얼마 뒤 장삐스는 결국 자카르타에서 위창원양항운회사(裕昌遠洋航運公司)를 설립했고 아체에서는 광푸원양윤선회사(廣福遠洋輪船公司)를 설립해서 싱가폴과 홍콩을 왕복했다. 그의 선박들은 독일우편윤선회사와 저가 경쟁이 치열했다. 결국 자신이 무시당했던 독일회사의 중국인의 1등선 승선 불가 규정을 고치도록 했다.
 1898년부터 장삐스는 사업의 영역을 말레이 반도와 싱가폴까지 확장했다. 1912년 그는 패낭에 만위싱개간회사(萬裕興墾殖公司), 그리고 만위싱총공사(萬裕興總公司)를 설립해 말레이반도의 각 부두 지점에서 외환을 교환해주는 업무도 담당했다.
그 밖에도 그는 약재업을 경영했고 싱가폴, 자카르타, 홍콩과 관동 등지에 약방을 설립하고 거대한 약재그룹을 형성했다. 그는 억만장자가 됐던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