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중국인>“예술은 심령과 영감을 나타내는것”
<중국,중국인>“예술은 심령과 영감을 나타내는것”
  • 한인희
  • 승인 2011.01.17 00:00
  • icon 조회수 48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과 서양 예술의 융합한 우관중<하>

우관중은 1938년 항저우예전 본과에 입학해 유화를 공부하면서 함께 중국화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40년에는 전공을 중국화로 전공을 바꾸고 은사 판텐소우의 학생이 됐다. 이때부터 역대 회화의 명품들을 모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화가들의 필수 코스의 하나였다. 기초를 닦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1년 다시 유화의 색채의 매력에 빠져들어 유화과로 전과했다. 유화의 예술적 감흥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국립항저우예전을 졸업하였다. 다음 해 최초로 개인전을 쓰촨의 충칭 싸핑바의 칭니엔꿍에서 가졌다. 곧이어 그의 예술 인생을 바꾸는 일이 발생하였다. 1946년 전국 국비장학생 선발 회화부분에서 1등으로 합격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됐다.
이와 관련해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우관중은 2006년 난징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이 편지는 이미 고인이 된 항저우 예전의 교장이었던 천즈푸(陳之佛) 선생의 딸 천시우판(陳修範) 교수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그녀의 부친이 1946년 베껴놓은 시험지 한 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험지에는 이름이 없었다. 천시우판교수는 우관중에게 ‘이 시험지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신가요’하고 물었다. 사연은 그러했다. 당시 천즈푸선생은 교육부의 위임을 받고 국비장학생 미술사 시험 채점위원이었다. 우관중의 답안지를 본 천즈푸는 너무도 완벽하고 우수해 몰래 자신이 직접 일일이 손으로 베껴두었다. 그리고 물론 우관중에게 최고점을 주었다.
이후 우관중이 천즈푸 선생을 만나게 됐는데 천즈푸선생이 자신의 답안지를 줄줄 외우고 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서도 천즈푸 선생은 우관중에게 답안지를 베낀 일을 밝히지 않았다. 이 일은 그렇게 넘어가고 잊혀졌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뒤 우관중은 직접 눈으로 당시 자신의 답안지의 내용을 보게 됐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했겠는가? 사실 우관중과 천즈푸선생의 인연은 밀접했다. 그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주비친(朱碧琴)여사와 결혼식을 하게 됐는데 바로 주례를 맡아주신 분이 천즈푸선생이었다. 결혼식 주례를 보시고 난 뒤 천즈푸선생은 우관중에게 기념으로 자신의 그림을 선물했지만 답안지 일은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우관중은 전혀 알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후 우관중은 1947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3년만인 1950년 가을 귀국하였다. 그런 뒤 중앙미술학원, 칭화대학, 북경예술학원, 중앙공예미술학원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0년 문혁기간에는 허베이(河北) 농촌으로 하방됐다가 1973년 북경으로 돌아와 계속 그림을 그렸다.
우관중은 처음 유화가의 모습으로 중국 화단에 등장하였지만 스스로 회화를 배우겠다는 목표를 삼았고 창작을 하는 과정에 소재와 지역성을 뛰어넘었다.
그는 북방의 광할한 초원, 강남의 안개 낀 마을, 파리의 거리 모습, 남양의 풍물 등 서로 다른 소재로 묘사하였고 중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70년대 들어서 비로소 유화에서 수채화로 바꾸게 된다. 그는 쉐페이홍(徐悲鴻), 린펑옌(林風眼)과 동 시대의 인물이지만 다른 화가들을 능가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중국화단에서 평가를 받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성’이다. 그는 “사람들은 기교를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교는 사고(思考)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의 예술 역정은 예술적 기교를 추구한데 있지 않고 예술적 ‘능력’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쉬지 않고 다양한 ‘사고’의 역정이다.
우관중은 20세기 중국 회화의 대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유화의 민족화와 중국화의 현대화에 뚜렷한 예술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여러 차례 중국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홍콩, 싱가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2000년 우관중은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 미술 아카데미(Académie des beaux-arts)의 통신원사에 선발됐다. 이는 중국인 예술가로서는 최초의 일이고 아시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직위를 획득한 인물이기도 하다.
작년 6월 25일, 그가 서거하자 그를 평가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그에 대한 평론가 수이티엔중(水天中)의 평가를 보자. “우관중은 중국미술계에서도 학술적으로는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중국 국가 미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일생을 바친 업적으로 유명한 예술대가이다.
그의 예술은 중서융합의 길에 최고봉이다. 그의 서거는 중국미술계의 커다란 손실이다. 우관중의 예술은 중서를 관통한다. 당대 중국 예술계의 최고봉이다. 중국 수묵화 분야에서 우선생은 시대를 초월하는 노력을 추구하였고 유화분야에서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강력한 민족적 특색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이 두 길은 서로 다른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중국인 특유의 ‘시의(詩意)’와 ‘심상(心象)’이 녹아있는 상호 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탐구정신과 우수한 자질은 중국인들에게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인 유산을 남겨줬다. 우선생의 정신은 질박하고 고상하며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스승이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자. “화가가 예술가의 길을 가는 자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은 환쟁이다. 작품을 발표하고 명리를 위해 살아가기에 바쁘다. 그러면 이미 학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노력하는 사람이 갈수록 적다.” “전 사회가 모두 경박하다. 간행물, 신문, 서적을 펴보라. 보이는 것, 모두 경박하다. 또한 화랑이 수두룩하고 전시가 빼곡하다. 이것을 언필칭 문화번영이라고 하지 밥그릇 싸움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군중심리에 영합할 뿐이다. 느낌을 보여주는 예술창작의 소박한 마음과 영혼과는 함께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스스로 자신의 심령과 영감이 나타나고 심령과 영감은 파는 곳이 없다. 예술은 본래 직업이 없는 것이다.”
“재능이란 마치 임신과 같다. 임신을 하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운 것은 임신이 안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밖에서 돌아다닌다. 바로 임신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붓과 먹은 제로와 같다. 화면에서 벗어나면 단독의 선과 색깔 모두가 제로이다. 필묵은 정형화된 물건이 아니다.” 그는 속물화되어 가는 화단을 질타하였다.
우관중은의 그림은 서양화와 중국화의 정수를 종합해 노련한 붓의 예술을 보여줬다.  
후기의 작품은 점과 선을 조형을 좋아해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창조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노래하고 그의 간난신고의 역경을 통해 오랜 시간 음미했다. 그가 일생동안 기증한 작품만 수천점이다.
 거의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2009년 말 그는 56점의 최근 작품을 16점의 진귀한 소장품을 절강성과 모교에 기증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절강미술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이로써 수많은 관중들을 감동시키고 그의 치열한 격정과 깨끗한 마음을 우리들에게 전해줄 것이다.
우관중의 작품은 판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계속 갱신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공개 판매 작품은 한하이(翰海)의 2010년 춘계옥션에서 1974년에 그린 유화작품 <장강만리도>가 5,712만 인민폐(한화 약 103억)에 팔렸다. 2010년 6월 25일 23시 57분, 우관중 선생은 병으로 인해 북경의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91세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추도회와 고별의식을 거행하지 않았으며 오직 청화대학에서 ‘우관중교수 추모회’만을 거행했을 분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