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시대와 세기를 뛰어넘은 예술가”
<중국, 중국인>“시대와 세기를 뛰어넘은 예술가”
  • 한인희
  • 승인 2011.0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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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서양 예술의 융합한 우관중<상>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지나놓고 보면 어느 해인들 조용하게 지나간 해는 없겠지만 지난 해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유난히 우리 민초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성 지센린교수가 집필한 책 제목처럼 세상일은 그렇게 ‘다 지나간다.’ 혼란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조용하게 마음을 다스리고 세상을 관조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여러 가지 일로 다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줄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음을 열고 ‘점과 선’의 세계인 그림들을 감상하는 일도 하나의 방법이리라.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년 6월 25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중국 화단의 ‘살아있던 전설’ 우관중의 그림과 그의 인생을 돌이켜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다.
우관중의 예술세계는 “시대와 세기를 뛰어넘은 공헌”이라는 찬사를 받는 화가다. 그는 화가이자 평론가로서 20세기 중국 화단에서 평론을 가장 많이 했었고, 영향력도 가장 컸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평론’은 논문이 아니라 중국 예술 현실에 대한 ‘충고’였다. 특히 그는 중국과 서양의 예술의 융합을 유난히 강조한 화가였다. 특히 자신의 조국, 중국에 대한 애정과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이러한 것들이 그가 이야기하는 ‘연은 실타래를 떠나지 못한다’라고 표현한 이유일 것이다. 모든 화가가 자신의 뿌리에 터 잡고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그의 작품 가격은 수천억을 상회한다. 그러나 마지막 28년의 삶을 베이징의 몇 평되지 않는 허름한 집에서 생활했다.
더욱이 그가 일생 심혈을 기울어 그린 작품들을 여러 미술관에 기증한 것도 그가 예술가로서 추구한 삶이 고상함을 엿보게 된다.
우관중은 1919년 장수성 이싱(宜興)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중국에서 ‘5·4’운동이 발발했던 해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현대문명은 ‘5·4’운동을 발상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그가 이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지만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하다.
1926년 우씨소학(吳氏小學)에서 공부했다. 1930년 이싱시엔(宜興縣) 어산소학교(鵝山小學)에 입학하고 다음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곧 이어 우시사범학교(無錫師範學校)에 입학한 뒤 3년간의 사범학교 초중과정을 마쳤다.
1934년 명문 저장대학(浙江大學)에서 설립한 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이 당시 많은 학생들은 취업을 걱정을 해 공과기술을 배우려는 것이 하나의 꿈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구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 우관중은 인생의 대전환을 맞이한다.
친구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저우더췬(朱德群)이었다. 전후 사정은 이러했다. 우관중이 대학 2학년이 됐는데 당시 국민당정부의 교육부 규정에 따라 학생들은 일률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이때 국립항저우예전의 저우더췬과 같은 연대 같은 반에 편성됐다. 이 역사적인 만남에 대해 저우더췬은 “군사훈련을 할 때는 각 학교가 혼성해 편성되어요. 나는 키가 제일 커서 제일 앞줄에, 우관중은 키가 제일 작아서 제윌 뒤에 서 있었어요. 내가 보고를 마치니 교관이 나에게 제일 뒤에 가서 서라고 했죠. 이렇게 해 잘 모르는 우관중과 함께 서게 됐고, 이때 서로 알게 됐어요. 사람이 정말 인연이라더니, 우리는 바로 친구가 됐죠. 우리 둘은 작은 술집에 가서 화띠아오라오지우(花雕老酒)를 먹으면서 장난삼아 우관중에게 우리 항저우예전으로 오라고 했어요. 군사훈련이 끝나고 정말 그가 왔어요!. 이때부터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듣고 같이 붙어 다녔지요”
당시 상황에 대해 우관중의 회고는 이렇다. “어느 일요일 저우더친이 나를 자기네 학교로 데리고 갔어요. 이 때 내가 본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림과 조각들이었어요. 이때 ‘아,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라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어요. 아마도 간난아이가 처음 본 세상풍경과 같았어요. 나는 아름다움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고, 이 아름다움은 젊은 나의 심장에 강한 충격을 주었어요. 그녀는 많은 동정으로 나를 포로로 잡은 것 같았죠. 나는 기꺼이 그녀의 포로가 되길 원했습니다. 17살이었던 나는 아름다움이라는 그녀에게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답니다. 한순간에 신기한 우주의 세계로 날아가면서 자신이 가난한 농촌 출신 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입학하기 힘들었던 절강대학의 전기과를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이어서 우관중은 자신을 “(저는) 한 마리 야생마였는데, 다시는 우리 속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전기과를 포기하고 예술전문학교에 입학하기 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우관중은 1936년 국립항저우예전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중국화와 수채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국립항저우예전은 중국 현대 고등미술교육의 발상지였다. 차이위엔페이(蔡元培)가 교육부 장관을 할 때 이 학교를 설립했다.
설립 목표는 “한 시대 미술 교육의  대표 교육기관”이 되는 것이었다. 초대 교장은 린펑옌(林風眠)으로 그는 설립 취지에 맞추어 중서 융합이라는 교육목표에 충실했다. 우관중이 중서 예술의 융합적인 특징도 바로 이곳에서 배양됐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만난 3명의 스승들이었다. 바로 린펑옌, 판텐소우(潘天壽), 우따위(吳大羽)로 이들은 우관중의 예술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스승이라는 인물사의 철칙이 여기에서도 적용됐다.
먼저, 린펑옌에 대한 우관중의 회고를 보면 “항저우예전 시기 린교장 선생님은 고학년 수업을 하셨다. 당시 나는 저학년이라서 한 번도 강의실에서는 수업을 받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분의 작품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을 만나 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작품을 사진을 찍어 그 분에게 보이면 선생님은 말씀이 많이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를 끄덕이시거나 가로저으시거나 하셨다. 나는 그분의 눈을 통해 작가의 내심과 감정의 진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관중의 기억에는 “린펑옌 교장 시기 국립항저우예전의 학풍은 서양현대 예술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일찍부터 회화에서의 형식미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기본 실기를 익히는 것 이외에도 색채, 선, 음율 등에 특별히 주의하면서 내가 젊은 시기 강의에 감격한 것은 어린 묘목의 성장하는 것은 정원사의 ‘지혜’와 ‘근면’함에 의해 가꾸어진다. ‘지혜’보다는 ‘근면’함이 더 중요했다.” 판텐소우 선생은 우관중을 직접 가르쳤다. 그는 우관중에게 필생에 영향을 미친 스승이다. 우관중은 “나는 운 좋게도 중국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판선생님께서 작품에 대한 안목과 인품을 배우게 됐고, 나의 심미관에 평생 영향을 미쳤다. 오늘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너무도 높은 산이셨다.
당시 국립항저우예전은 학생들인 서양화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화에 대한 수업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판선생의 작품과 인품에 대해서는 모두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에 대한 권위는 학생들이 사고를 쳐서 훈도처가 손을 쓸 수 없을 경우, 판선생님이 나서서 몇 말씀 하시면 곧 해결될 정도였다. 항전시기 윈난과 쓰촨으로 학교가 옮겨갔을 때 판선생님은 가족을 데리고 오시지 않았다. 일부 학생들은 농촌의 세집에 살고 계신 선생님 집에 가서 서예, 미술사, 시사(詩詞) 등을 직접 선생님께 배웠다.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신 뒤에도 나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린풍옌, 판텐소우 선생이 우관중의 전체적인 문화관과 예술적 감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면, 우따위 선생은 우관중에게 개성과 예술적 주장을 강조했다. 따라서 우관중의 강렬하고 독보적인 예술적 개성은 우따위 선생으로부터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우관중의 눈에는 “당시 서양화로서는 우따위 선생이 최고였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편지는 마치 강의안과도 같았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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