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현 장편소설] 태양의 밀서 <193>
[김자현 장편소설] 태양의 밀서 <193>
  • 현대일보
  • 승인 2010.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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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자유는 구속으로부터 - 17. 빛을 향하여
목소리의 주인공인 늙은 사내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은 갑자기 저린 오금을 펴면서 일어섰다. 기온이 내려간 새벽바람에 소름이 오싹 돋은 사람들은 맞이하는 사람도 뛰어내리는 사람도 누구하나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주 멀리서 가끔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 사이로 툭탁거리는 발걸음과 냉동차에서 뛰어내리는 둔탁한 발소리만이 새벽 공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짭조름한 갯내음을 동반한 해풍은 밀항자들의 쭈그러들은 허파꽈리를 부풀리면서 그들의 가슴으로 쳐들어갔다. 십여 분이 지나고 다 내려왔는지 냉동차에서는 더 이상의 사람 그림자가 내려오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늙은 사내가 탑차를 손바닥으로 탁탁~치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섰던 젊은 기사가 문을 닫기 위해 다가왔다. 문을 닫으려던 그는 제일 안쪽에 뉘어있는 희끄무레한 것을 발견하고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탑차로 펄쩍 뛰어올라갔다. 잠시 후 그의 어깨에는 축 늘어진 가냘픈 여인이 메어져 있었다. 늙은 사내의 지시에 의해 탑차 끄트머리에 여자가 뉘어졌다. 역시 늙은 사내가 늘어진 여자의 턱밑에 검지를 댔다.
“갔군! 사과 냉동고에 넣는다.”
늙은 사내 뒤에 서 있던 장정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죽은 여자를 들쳐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대형 창고로 들어갔다. 연병장만한 창고 왼쪽으로는 콘테이너 박스 두 기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간이 숙소인지 작은 창문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콘테이너 박스에 그들과 방향을 달리한 대형 냉장고 세 대가 철문을 향해서 나란히 버티고 서 있었다. 시체를 울러 멘 사내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자 뒤에서 청색의 런닝을 입은 젊은이 하나가 달려와 냉장고의 잠금장치를 돌리고 철컥- 문을 열었다. 사과박스가 촘촘이 쟁여있는 앞에 여자의 시체를 가로로 내려놓았다. 사내가 돌아설 때 다음 냉동탑차가 이미 열렸는지 밀항자들이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또 십여 분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났을 때 냉동차 안에 다시 시체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도 여자였다. 똑같은 순서에 의해 또 하나의 시체가 사과 냉동고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제 잔류 밀항자는 164명인 셈이다. 탑차의 문이 쾅~ 쾅~ 닫히고 엔진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흰색 탑차의 질주에 핼쓱한 새벽 마당이 둘로 갈라졌다. 두 대의 냉동탑차가 떠나고 나자 다시 정적이 수산물창고에 내려앉았다. 마당에 있던 사내들이 창고로 모두 들어가자 대형철문을 닫는 드르륵~ 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왔다. 그리고 쇠빗장이 질러지고 대형 자물통이 매달렸다.
“후딱 일렬횡대로 선다.”
후래쉬를 들고 있는 늙은 사내의 목소리가 컴컴해진 창고 속을 흔들었다. 사방에 난 창문으로 엷어진 새벽공기가 겁을 먹으며 새어 들어왔다. 사내 뒤에는 좀 전의 장정 두 사람이 버티고 섰다.
“당신들 좋은 일자리와 식사 준비할 사람을 몇 명 차출한다.”
후래쉬가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며 지나갔다. 건강하고 이쁘장한 여자의 얼굴에 빛이 머물면 뒤에 섰던 사내 둘이 다가와 양쪽에서 여자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끌어냈다. 바로 그 때 뜻하지 않게 아이돌의 랩 음악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선택되지 않은 밀항자들은 밝아오는 창고 바닥에 앉아 이 뜻하지 않은 음악소리에 피곤을 느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사방에 널려있는 비닐 돗자리를 펴고 드러눕기 시작할 때 차출된 여자 여덟 명은 세 명의 장정들의 인솔 하에 오른쪽 냉동고를 돌아서 어딘가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앞서서 가던 장정 둘이 냉동고 뒤에 있는 방 하나를 밀었다. 농축산물 샤워실로 들어갔다.
“너희들 5분 안에 도야지들 샤워를 마친다. 회장님이 너무 오래 기다리신다.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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