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통해 본 행복과 민주주의
미국 대선을 통해 본 행복과 민주주의
  • 현대일보
  • 승인 2023.01.1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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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철 중앙대 명예교수

 

영국은 1812년부터 1813년까지는 나폴레옹과의 유럽전쟁으로 미국과 전면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1814년 4월 엘바섬으로 귀양)으로, 1814년 8월 영국은 14,000명의 군 병력으로 미국에 총공세를 폈다. 이 결과 1814년 8월 24일에는 수도 워싱턴이 함락 (대통령 관저와 국회 도서관이 일부 소실)되고 매디슨 대통령은 버지니아로 피신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테네시 출신의 잭슨 장군(Andrew Jackson)은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영국군에 대승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12,0 00명 가운데 2,000명이 사망을 하거나 부상 (미국군은 13명 사망, 56명 부상)을 당했다. 

뉴올리언스 전투는 벨기에의 겐트(Ghent)에서 평화조약이 체결(1814.12.24) 된, 2주 후에 발발했다. 이런 아이러니는 겐트 평화조약이 미국에 알려진 것은 1815년 2월 초였기 때문이다. 겐트 평화조약은 결국 미국이 캐나다를 뺏으려는 계획이 무위로 끝난 채 양측이 전쟁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 bellum)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미전쟁은 그러나 양측에 중대한 교훈을 안겨 주었다. 영국 측에는 미국은 전쟁에 패할 수 없다는 것과 미국 측에는 캐나다 역시 미국이 생각했던 것같이 쉽게 정복될 수 없다는 교훈을 안겨 주었다. 이런 양측의 교훈으로 미국과 영국은 1817년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을 맺어 미국과 캐나다 국경을 서로 무장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영미전쟁은 미국이 더욱 단결하고, 더욱 애국적이고, 더욱 중앙집권적(more united, more patriotic, more central)인 재편 구조를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이의 예로 매디슨 대통령이 1816년 12월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를 보면 ①국방 (nationa l defense)을 위해 군비를 증액할 것과 ②강력한 해군을 유지할 것과 ③상비군 (standing army)을 늘리고 지원병을 연방정부가 통제할 것과 ④연방의 보조로 전국의 도로와 운하를 대폭 개선할 것과 ⑤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보호관세 (protecti ve tariff)를 물릴 것과 ⑥중앙은행 (national bank)을 설립할 것 등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1825년에는 이리(Erie) 운하가 완성(1816년 시작)되었고 1840년까지는 전국에 1만 마일 이상의 유료도로(turnpike)가 완공되었다. 매디슨의 이런 정책 전환은 제퍼슨이 주장하던 소정부 또는 최소한의 정부에 반대되는 것으로 결국 제퍼슨 파인 매디슨 정부는 연방당이 주장하던 중앙은행, 보호관세,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장해 반 연방당은 결국 소멸되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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