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관념과 기억을 중시한 기존 서양철학에서 벗어나, 망각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할 능력이라고 설파한 철학자이다. 니체는 기억은 일종의 재난이자 질병이며, 우리는 망각을 통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망각이 없다면, 우리는 가득 찬 과거로 인해,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니체의 말처럼 정말 망각이 기억보다 중요한 것일까? 때에 따라서는 망각이 필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에게 고통을 들여다보게 하고, 참상에 대한 반성과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자신의 저서인 the Korean War : a history에서 6.25 한국전쟁이 한국에서는 ‘잊을 수 없는 전쟁’, 미국에서 ‘잊힌 전쟁’이라 불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것만을 기억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은 우리 영토에서 한 민족이 서로를 파괴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전쟁이 됐고 미국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잊힌 전쟁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전쟁이라고 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겐 다시 살아가기 위해 니체가 말한 망각은 일정 부분 필요했을 것이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거나, 몸을 다치거나, 전쟁의 끔찍한 경험들로부터 벗어나, 다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전쟁의 상처를 입은 개인의 입장에서 ‘망각’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면일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국가의 의무는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곧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는 이러한 기억의 의무를 끝까지 이행해야 한다. 책임을 다하는 기억이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기록하는 것을 넘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인을 분석하여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실천적인 재발방지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징비록’이란 책을 통해 기록했다. 왜란의 실패의 원인을 찾고 다시는 이와 같이 전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됐지만, 징비록은 곧 조선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채 30여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다시 두 번의 호란을 겪었다. 기록은 기억의 출발이지만, 그 출발점에서 나아가지 못하면 똑같은 고통을 다시 겪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수만개의 호국나비가, 우리의 기억이 닿지 못하여 고마움을 전달할 수 없는 곳까지 건너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