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첫 미사일이 그의 손에서
中 첫 미사일이 그의 손에서
  • 한인희
  • 승인 2009.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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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미사일과 우주개발의 아버지’ 첸쉐썬<상>

지난 10월의 마지막 날, 중국에서는 ‘중국 미사일과 우주개발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과학자이자 항공우주학자 첸쉐썬(錢學森)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세였다. <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들은 그의 별세 소식을 주요뉴스로 전했다. 이날 베이징에는 수십 년 만에나 있을 법한 10월 폭설이 쏟아졌다.
첸 박사의 자택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는 등 추모 물결이 일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야 한다는 건의도 있을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중국공산당위원회 장례로 결정됐다.
첸쉐썬은 누구인가? 왜 이토록 중국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인가? 중국의 우주, 무기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중국의 미사일 개발과 항공학 연구를 주도해 70년대 중국의 첫 핵탑재 탄도미사일 발사, 지구위성 발사 등 성과를 올렸고 2003년 유인우주선 선저우5호 발사의 토대도 닦았던 인물로 오로지 국가와 학문을 위해 살다가 인물이기 때문이다.
첸쉐썬은 1911년 12월 11일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저쟝성 항저우이고 부친 첸쟈쯔(錢家治:자는 均夫, 1880-1969)는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였다. 이후 부친이 북평(당시 베이징을 北平으로 불렀다)의 민국정부 교육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베이징의 선무문(宣武門) 근처에서 살게 됐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베이징에서 마친 첸쉐썬은 상하이의 명문 쟈오통(交通)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934년 쟈오통대학을 졸업한 뒤 1935년 8월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의 MIT공대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미국에 도착한 첸쉐썬은 MIT공대의 항공학과에 입학했다. 성적은 계속 선두그룹이었다. 당시 MIT공대에서는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공장 실습을 해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공장에서는 중국인들을 깔보는 풍토가 있었다.
어느 날 미국 학생이 중국인을 비웃으며 중국인들이 아편을 피우고, 전족을 하고, 무지몽매하다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천쉐썬은 그 학생에게 “우리 중국은 국가적으로는 미국보다 낙후 됐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너희들 누구와도 경쟁해도 이길 수 있다”라고 하면서 기말고사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 그의 그러한 태도에 미국 학생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고, 더 이상 중국인들을 깔보지 않았다.
그는 1년 뒤 ‘항공엔지니어이론’ 분야로 전공을 바꾸고 응용역학을 공부했다.
이후의 그의 경력을 살펴보자. 1935년부터 1939년까지 MIT공대 항공학과에서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캘리포니아공대(칼텍)의 항공 및 수학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칼텍의 항공학과의 연구원이었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칼텍의 항공학과의 조교수로 있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칼텍의 항공학과의 부교수였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MIT의 항공학과부교수 및 공기역학 교수로 있었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칼텍의 분사추진력센터 주임, 교수로 근무했다.
첸쉐썬은 칼텍에서 명망을 얻게 됐다. 그 이유는 은사인 헝가리인 폰 칼만(Theodore von Kármán)을 만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문세계에서 아직은 초보 수준이었던 첸쉐썬으로서는 당시 학계의 최고였던 칼만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첸쉐썬은 칼만박사의 최고의 조수가 됐다.
1930년대 초 미국의 항공학계의 학문 수준은 아직은 걸음마 단계였다. 그러나 칼만은 당시 이 분야에서 최고 정상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후에 칼만은 ‘초음속 비행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뛰어난 업적은 1970년, 달 표면의 한 지역을 그의 이름을 부쳐줄 정도로 미우주항공학계가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1945년 초 첸쉐썬은 폰 칼만을 단장으로 하는 공군과학자문단의 일원이 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을 하자 첸쉐썬은 자문단의 일원으로 유럽의 항공과 미사일 기술을 시찰했다. 1947년 초 36세가 된 첸쉐썬은 MIT공대의 정식 교수가 됐다.
이해에 첸쉐썬은 조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 돌아왔다. 이유는 어린 적 친구 장잉(蔣英)과의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장잉은 성악가였다.
이들의 만남은 집안어른 사이에 친구였던 인연 때문이었다. 첸쉐썬의 아버지 첸쥔푸(錢均夫)와 장잉의 부친 장바이리(蔣百里)는 항저우 서원의 동창이었고, 이후 함께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두 사람은 이후 베이징에서 근무하면서 두 집안의 왕래가 빈번했다. 장잉은 5살 때 자주 첸씨 집에 놀러가고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당시 두 집안은 친구들을 불러 가족 모임을 갖고 정식으로 장잉을 첸씨 집으로 받아들인다는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도 첸쉐잉(錢學英)으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이미 90세가 넘은 고령의 장잉여사의 회고를 들어보자. “(당시) 얼마 지나자 부모님들께서는 정신을 차리시고 나를 첸씨 집안에 보내시는 것을 무척 아쉬워하셨어요. 부모님들께서는 첸씨 집안에게 이제 우리 셋째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때 첸쉐썬의 어머니께서 지금은 아이를 데려가시지만 따님은 이미 저의 양녀이고 장차 우리 집안의 며느리가 될 거예요”라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장잉은 1937년 독일의 베를린 음악대학 성악과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긴 유럽에서의 음악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첸쉐썬은 그녀보다 2년 앞서 193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렇게 하여 한 사람은 미국에서 항공기계이론을, 한 사람은 유럽에서 성악예술의 예술의 바다를 헤엄치고 다녔다. 이들은 10여년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바이리가 미국을 시찰하는 도중 첸쉐썬을 만나고 그에게 셋째 딸 장잉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1947년 7월 7일 칠석날 첸쉐썬은 장잉에게 사랑의 고백을 했고, 이 한쌍의 ‘견우와 직녀’는 상하이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됐던 것이다.
그들의 결혼 선물은 독일 피아노였고 평생 동안 이 부부와 함께 하고 있다. 결혼한 이후 이들은 미국에서 생활했고 1남 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첸용깡(錢永剛)이고 딸은 첸용쩐(錢永眞)이다. 
1947년 9월 26일, 이들 신혼부부는 미국의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첸쉐썬은 계속적으로 항공우주분야의 뛰어난 학술연구를 발표했다. 폰 칼만이 이끄는 구겐하임항공실험실(Guggenheim Aeronautical Laboratory)의 연구생이 됐고, 이 실험실은 이후 미국 미사일 기술의 요람이 됐다. 첸쉐썬은 이곳에서 추진한 미사일 기술 최초의 3명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1955년 첸쉐썬이 중국으로 영구 귀국하기 위해 은사 폰 칼만을 찾아갔다. 이별의 인사를 위해서였다. 은사 칼만은 “자네의 실력이 이미 나를 넘어섰구만!”하고 칭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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