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학문과 소양 앞에서 “돈과 권력이 초라하구나”
그의 학문과 소양 앞에서 “돈과 권력이 초라하구나”
  • 한인희
  • 승인 2009.09.07 00:00
  • icon 조회수 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최고의 골동품 수장가이자 ‘민국시기 4대 공자’ 장보쥐<하>

1900년대 초기 ‘민국4공자’라는 이야기가 남방에서 등장해 점차 베이징, 텐진, 상하이의 상류층에게 공인되면서 이른바 다양한 ‘버전’이 유포됐다.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장보쥐와, 푸동, 위안커원(袁克文), 장쉐량(張學良)의 설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들의 행적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먼저 푸동은 마지막 황제 부의(溥義)의 집안 형으로 도광(道光) 황제의 증손자렸다. 별명은 ‘홍두관주인(紅豆館主人)’이였다. 그는 7세 때 이등진국장군(二等震國將軍)에 임명됐지만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른바 ‘태어나면서부터 한가한 인물’이었다. 시, 서, 화에 능하고 문물 감정에 정통했으며 황친귀족이었다. 경극, 곤극(昆劇) 예술을 공부하면서 저명한 예술인들과 친교했고 별칭으로 ‘표계대왕(票界大王:아마추어 연극)’이라고 불렸다. 일찍이 한 차례 경극 공연에서 5명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서 그 명성이 높았다.
다음으로 위안커원은 위안스카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한담을 즐겼고 일생동안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시사대련(詩詞對聯), 금기서화(琴棋書畵), 문물감상 등에 무소불위였다. 더욱이 ‘행·초·예·전서’ 등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당시 서예실력은 최고의 수준이었다.
장쉐량은 사람들이 모두 잘 아는 인물이었다. 일찍이 여러 차례 중국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의 문물감상 분야는 조예가 깊었다. 다만 그와 다른 ‘4공자’와 비교해 보면 조금 차이가 있었다면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대체로 그가 당시 풍운인물이었기 때문에 ‘민국4공자’에 끼었다고 할 수 있다. 장보쥐는 ‘민국4공자’와는 모두 왕래가 있었고 특히 위언커원과는 의기투합해 매우 친밀했었다.
장보쥐는 원래는 부인이 둘이 있었다. 한 명은 전통적으로 봉건 가정의 부모가 정해준 부인이었고, 한 명은 처음에는 관계가 좋았으나 취미가 달라서 오래지 않아서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눈에 반한 세 번째 부인이 바로 이후의 저명한 ‘청록산수화’의 대가였던 판수(潘素)여사였다. 미모가 뛰어났던 판여사를 당시는 모두 ‘판비(潘妃)’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미인이 많다는 쑤저우 출신이었다. 비파를 아주 잘 탔으며, 일찍이 상하이 시장루(西藏路)와 산터우루(汕頭路)가 교차하는 곳에 일품향주점(一品香酒店)이라는 곳에 있었다.
그녀가 처음 상하이에 왔을 때는 글도 잘 읽지 못할 정도였지만 자태는 매우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서서히 재능이 들어나면서 ‘쑤저우 출신’답게 그림에도 재능을 발휘했다. 상하이 사교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장보쥐는 염업은행의 총감사였지만 은행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종일토록 서화 수장과 경극감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보쥐가 일 년에 두 차례씩 염업은행 상하이 분점 감사를 갔다. 이 기회에 상하이에서 우연히 판여사를 만나게 됐다. 그들은 마치 ‘영웅이 영웅을 알아보듯’ 서로가 한눈에 반했다. 그러나 ‘판비’는 당시 이미 이름이 나있었던 인물이었고 이처럼 ‘아름다운 꽃’은 반드시 주인이 있는 법, 그 주인은 국민당의 장쭤(臧卓) 중장의 애인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장쭤는 일품향주점에 그녀를 ‘연금’했다. 그러나 장보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장쭤 장군의 경호원을 매수해 그녀를 구출해 부인으로 삼았고 평생을 해로했다.
장보쥐는 은행을 경영하면서도 크게 돈을 벌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가업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뿐, 돈에 대해서 특별히 탐하지 않았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에게 공채를 사면 크게 돈을 벌 것이라고 충고했으나 그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에게 앞으로 외환파동이 올 것이니 외환을 사두면 돈을 벌 수 있다고 권고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은행에서 수표를 발행해도 은행의 자본액과 똑같은 액수로 수표를 발행했다. 일반적인 관행은 자본금의 10배 이상을 발행했으나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자 않았다. 특히 자신의 염업은행의 모든 업무는 총경리 우정창(吳鼎昌)에게 맡겨 책임지도록 했다. 은행업무와 관련해 그에게는 세 명의 조수가 있었다. 양시밍(楊西銘), 천샹쉐(陳香雪), 바이소우즈(白壽芝)였다. 바이소우즈는 공문과 서신처리를 담당했고, 양시밍과 천샹쉐는 구체적으로 장부 검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총경리 우정창도 그들의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정창은 일을 함에 진지했고 일생동안 첩도 두지 않았고, 동전 한 닢도 개인적으로 갖지 않았다. 당연히 장보쥐는 우정창과 모든 일을 상의하면서 평생 동안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장보쥐는 일생동안 중국의 고대 문물에 심취했다. 그리하여 서예와 그림을 수장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는 나이 30세부터 고대 서화를 수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좋아서 했으나, 나중에는 주요 문물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많은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의 골동 수집의 내용을 살펴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예작품인 서진(西晉)시기 루지(陸機)의 <평복첩(平復帖)>을 사들였다. 이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의 작품이다. 서성(書聖)이라는 왕시즈(王羲之)의 작품보다도 80년 정도가 앞선 작품으로 이른바 ‘중화 제일의 첩’이라는 작품이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의 작품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인 수나라의 전자건(展子虔)의 <유춘도(游春圖)>는 ‘국보 중의 국보’라고 할 수 있고 ‘천하제일 화권’이라는 멋진 이름이 붙은 중국의 국보이다.
이들 작품을 모두 사재를 들여 사들였다. 1936년 초봄에 장보쥐는 당나라시기 걸출한 화가 한간(韓幹)의 <조야백도(朝野白圖)>가 상하이의 골동상이 사들였다는 정보를 들었고 이 작품은 영국으로 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 절통해 하기도 했다.
이후 수 많은 국보 작품들을 모두 사들였고, 1932년부터 <총벽서화록(叢碧書畵錄)>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그는 1956년 30년간 수장한 진품들을 모두 국가에 아무런 조건 없이 헌납해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있도록 했던 인물이다.
사회주의 중국이 된 이후 장보쥐는 천이(陳毅) 외교부장과는 오랫동안 바둑친구로서 우정을 나누었고, 1957년에는 우파분자로 낙인이 찍힌 뒤 1980년에 복권이 됐지만 1982년 2월 26일 향년 84세로 베이징에서 눈을 감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장보쥐는 당대 문화고원에서 고요한 준봉이었다. 이러한 인물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평가를 했고, 조우뤼창(周汝昌)은 “내가 평생동안 보아왔던 많은 문화의 명인들이 있지만 장보쥐와 같은 인물은 거의 드물다”라고 평가했으며, 스소우칭(史樹靑)은 “중국의 근대에서 이처럼 학문이 높고 소양이 있는 사람을 접촉해 본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돈과 권력이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진정한 문화명인의 표본을 보여준 삶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