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현대일보
  • 승인 2019.06.1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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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록학의 개척자(15)

 

◆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록학의 개척자(15)

1년과정의 본과생의 입학생은 1947년 10월에 모집했는데 60명 모집에 260명이 지원해 5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신문학원 출신으로 교수가 된 인사로는 김동철(3기, 이화대), 팽원순(한양대), 최종수(광주대) 그리고 전영우(수원대)등이 있다. 그리고 언론계에 진출한 인사로는 노정팔(1기, KBS 이사장), 오소백(2기, 한국일보 부국장), 이환의(경향신문 사장), 서영훈(KBS 사장)등이 있다.

조선신문학원은 한국동란 시절(1950-53)인 1952년 4월 부산서 명칭을 서울신문학원으로 바꾸고 다시 문을 열었더. 전시였으므로 수업시간은 야간 6개월로 축소했고 50명을 정원으로 했다. 곽복산은 6.25 동란 후 제주신문 주필을 했다. 그는 군납부조리를 폭로한 “국민 방위군 사건”으로 한 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2년 3월에는 동아일보에 재 입사해 이듬 해 4월까지 편집국장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곽복산은 동아일보로 복귀한 직후에 조선신문학원의 명칭을 서울신문학원으로 고쳐 문을 열었다. 서울신문학원은 1947년부터 1962년에 이르기 까지 15년 간 공개적으로 운영하다가 실질적으로 중단됐다. 곽복산은 1955년 신문학개론을 서울신문학원 출반부 명의로 발간했는데 이 책은 학원 뿐아니라 대학에서 신문학과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곽복산은 청량리 홍능에 있는 자택에 “사단법인 서울신문학원 사무국”이라는 간판을 걸고 학원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신문주간에는 학원명의의 행사를 가졌다. 이와 관련해 1963년에는 제7회 신문주간의 표어 “신문의 독립성”이란 주제로 신문회관에서 심포지엄을 가졌다.

심포지엄 참석자들로는 곽복산(서울신문학원)외에 김규환(서울대), 김동철(이화여대), 박권상(동아일보), 오주환(고려대), 오소백(대한일보), 임근수(중앙대), 임방현(한국일보), 최준(중앙대), 홍승면(동아일보)등 다수가 참석했다. 곽복산은 이 후로도 때때로 단기의 신문학 강좌, 신문사나 방송국의 초청에 의한 출장 강의 그리고 소수의 연구생을 지도하면서 창립 20주년까지 홀로 명맥을 유지했다.

1967년 4월3일에는 서울신문학원 20주년 기념식과 “한국의 언론선구자 추모 강연회”를 신문회관에서 개최했다. 이 기념식에는 공보부장관 홍종철을 비롯해 언론계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여기서 곽복산은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인 임영신박사(중앙대 창립자겸 총장)로부터 공로 표창장을 받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69년 11월에는 곽복산 교수가 중앙대학교에 신문방송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을 맡으면서 서울신문학원은 이 연구소에 정식으로 흡수되었다. 이로 인해 서울신문학원 출신은 이 연구소에서 졸업증명서를 발급 받을수 있도록 했다.

곽복산 교수는 신문방송연구소의 소장을 맡았으므로 임영신 총장의 승인을 받아 신문연구소 규정에 서울신문학원 졸업생은 중앙대학교 신문방송연구소에서 졸업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곽복산은 1935년 일본의 상지대학에서 1기 생으로 신문학과를 졸업한 후 해방 후인 1947년부터 자신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이자 단 하나 밖에 없는 신문학원에서 신문학을 가르쳤다.

이로 인해 대학에서 신문학 강좌가 개설되기 시작했을 때 이를 주도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신문학원 강사인 동시에 최초의 대학 신문학 강사였던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1949년 4월 서울대학교가 한국에서 최초로 신문학 강좌를 개설했을 때 이 강좌를 가르치기 시작해 대학 신문학강사 1호가 되었다. 한국전쟁(1950.6.25-1953.7.27)으로 서울대학에서 신문학 강좌가 일시 중단 되었다가 서울이 수복되면서 다시 이 강좌가 시작되었을때도 곽복산이 서울대학에서 2년간 신문학을 가르쳤다.

서울대학에 이어 연희대가 부산 피난 시절인 1953년 4월부터 신문학 강좌를 시작했을 때 도 역시 곽복산이 이를 가르쳤다. 서울 수복후로는 여러대학에서 신문학 강좌가 개설되기 시작했는데 중앙대학의 신문학 강좌는 곽복산이 담당했고, 고려대학의 신문학 강좌는 오주환, 이화대학의 신문학 강좌는 최완복이 담당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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