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이상철
  • 승인 2019.05.1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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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곽복산의 인격

 

 

 

 

 

 

 

 

 

 

 

 

 

 

 

◆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2)

우리 사회에도 우리역사에 영원히 남을 만한 지성인이 있는데 그가 바로 함석헌이다. 그는 사상계(1967.1월)에 게재한 글에서 박정희 군사혁명의 부당성에 관해 이런 직언을 했다. 지위는 관덥개 밑에 들어가는 날 같이 떨어져 버리고 사업도 비석에 글자가 지기 전에  먼저 무너져 버리는 것이니 영원히 남는 것은 양심과 이성으로 쌓아올린 인간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 군사 쿠테타를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나라를 바로 잡자는 목적은 좋았으나 수단이 틀렸습니다. 수단이 잘못 되었을 때 목적은 그 의미를 잃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나라의 기본이 되는 헌법을 깨치고 직접 정치에 손을 댔을 때 후예를 위하였거든 마땅히 무기를 들지 말고 비밀리에 일을 꾸미지도 말고 정정당당하게 청천백일 하에 내놓고 항의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혁명이론이 없습니다.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 지금의 민중은 영웅의 휘두름을 따라 폭동을 일으키던 옛날의 군중과는 다름니다. 저들은 자각해 가는 인간이므로 이론을 요구합니다.

언론인 송건호는 함석헌의 박정희에 대한 직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이 글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함석헌이야말로 한국 전체 언론인을 다 합쳐도 못핳 일을 한 진정한 언론이라고 했다. 

박정희는 그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20년간에 걸친 집권기간 동안 그를 감시는 했어도 구속하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그의 양심, 애국심, 용기를 내심 존경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송건호는 말했다. 함석헌 전집 9. 역사와 민족. 한길사, 1988, p.158.

나는 곽복산 교수를 처음 만날 때부터 인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볍게 볼 수 없는 무게가 있어 보였다. 그는 말하기 보다는 듣는 형이었다. 그는 언제나 미래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구상하는 사고 형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말은 짧게 하고 생각은 깊게 하는 편이었다. 그는 남과 대립하기 보다는 설득 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그는 일상대화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많이 했기 때문에 무게가 있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곽복산은 주어진 상황을 남 보다 먼저 잘 파악해 최선을 다하는 리더십의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예측을 잘 하고, 앞장을 서고, 상대방의 사기를 올려주고, 상대방을 포용하고, 자신을 낮추고, 양보와 타협을 잘 하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상대방을 진심으로 설득하는 리더십이 강했다. 

곽복산은 기자로서 현직생활과 기자교육 그리고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할 때도 리더로서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비전을 제시했고, 설득력이 탁월 했으며, 도덕적으로 일관성이 있었고, 모든 일에 열정을 쏟아 부었고 과감한 판단력과 추진력을 보여 주었다. 

당시 동료 교수였던 최준은 곽복산 교수의 60년 생애를 증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곽복산은 언론인으로서 현직생활 보다는 언론인 교육을 위한 교단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 했다고 했다.

최준 교수의 말도 일 리가 있다. 하지만 곽복산 교수는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로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볼수 있다. 곽복산은  35년간, 일제치하에서 살면서 자신의 생애를 위해 온갖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이 결과, 곽복산은 동아일보 지방주재 기자, 사회부 기자, 사회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에 이르기 까지 모든 중요한 직책을 다 거쳤다. 그가 불과 15세의 나이에 동아일보의 주재 기자로 일했다는 것은 그가 신문에 관해 얼마나 관심과 열정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1940년 대동아전쟁으로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회부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곽복산이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로 있했다는 것은 곽복산 교수의 인격이나 도덕적으로 보아 죄책감을 느꼈을수도 있다

곽복산은 그리고 민족지인 동아일보에 사회부기자로 일하기 전 일본 상지대학 1기생으로 졸업을 한 것은 애초부터 그가 신문의 현장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문학 교육에도 못지않게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곽복산이 일제의 치하에서 벗어나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는 35세였다. 인생에 있어서 30대 중반이라면 매우 중요한 시기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의 절정기는 30대와 40대이다. 링컨은 나이 40대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다. 이는 40대 까지는 무엇인가 되어야지 그 후는 무엇이 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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