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소로와 월든 (1)
[현대일보 칼럼]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소로와 월든 (1)
  • 이상철
  • 승인 2018.09.0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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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력과 직업

자연주의 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17년 7월12일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마을에서 네 명의 자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성냥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는 그의 형 존 대신 헨리를 명문고교인 센터스쿨을 거쳐 하버드 대학에 보냈다. 그 이유는 헨리가 형인 존 보다 장래가 촉망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그의 성적인 보통(adequate)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1837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특히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이태리어, 독어, 스페인에 이르기 까지 언어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그 외에 헨리는 지리학, 광물학, 해부학 그리고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에도 관심이 많았고 조예도 깊었다.

언어와 관련해 헨리는 이런 말을 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쓰여 진 고전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읽지 않는 사람은 인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불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며 호메로스가 그리스어로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지금까지 영어로 번역된 적이 없다고 했다.

헨리는 당시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사람치고는 별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다. 당시 하버드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을 보면 성직자나 변호사, 사업가 또는 적어도 선생을 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전문직에 종사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당시 많은 젊은이들 같이 보다 많은 기회가 열려있는 서부로 진출해 보다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헨리 소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 집에서 보냈다. 그러던 중 데이비드는 자신이 학생으로 공부를 했던 콩코드 센터스쿨의 선생으로 채용됐다.

1837년 불어 닥친 경기침체의 상황을 고려할 때 연봉 500달러는 적지 않은 대우였다. 하지만 헨리 소로는 학교당국으로부터 학생들의 소음수준이 심각하니 훈육을 위해 체벌(corporal punishment)을 하라는 지시가 있자 2주 만에 사직했다.

그 후 마땅한 직업이 없자 아버지가 연필을 제조하는 일을 도왔다. 일년  후 헨리 소로는 형 존과 사설학교(private school)를 열었다.

이 사설학교는 오는 날 학생들이 자연에서 스스로 배우고 경험하는 생태학습의 장이 됐다. 이 사설 학교는 1841년 4월 부득이 문을 닫게 되는데  형 존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헨리 소로는 1847년 하버드 대학 1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자신의 직업을 이같이 밝혔다: 선생, 가정교사, 측량사, 정원사, 농부, 페인터(하우스 페인터), 목수, 석공, 일용직 노동자, 연필제조자, 그래스페이퍼 제조자, 작가 그리고 시인이라고 했다.

소로가 이같이 자신의 직업을 소상하게 밝힌 이유는 평생을 일에 억매 어 살지 않기 위해 누구에 의해 고용되지 않고--자신이 직접 지은 월든의 오두막집을 포함해--자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오로지 두 손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연가운데서 자연을 벗 삼아 공부를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전념했기 때문이다. <다음주에 계속>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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