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자 추앙받는 학자
이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자 추앙받는 학자
  • 한인희
  • 승인 2009.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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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언어에 능통했던 중국 ‘동방학’의 대가 지셴린 교수

지난 7월 11일, 중국의 저명한 학자 지셴린이 세상을 떠났다.
중국정부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해, 전 총서기였던 지앙저민(江澤民) 등 현직과 전직의 국가 지도부의 모두가 문상을 할 정도 한 학자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인터넷 상에는 특별사이트(http://book.sina.com.cn/z/jixianlin/)를 만들어 국민 모두가 애도를 표했다.  19일 베이징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중국의 매체들의 지셴린에 대한 보도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중국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처럼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학자인 지셴린은 누구인가?
지셴린는 1911년 8월 6일 산뚱성 린칭(臨淸)시 캉좡(康庄)진에서 태어났고 올해로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직함은 7개가 넘고 12개 언어에 정통한 학자였다. 고문자학자. 역사학자, 동방학자, 사상가, 번역가, 불교학자, 작가 등이 그의 이름에 따라 다닌다. 베이징대학 교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지셴린은 우리에게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큰 스승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자 국가의 지도자인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리자오싱(李肇星) 전 외교부장 등의 자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 장이머우는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 대표 신문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터넷 사이트는 지셴린의 생일 축하 기념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특집 코너를 신설했을 정도다.
지셴린의 고향 산둥성 린칭시에는 지셴린 자료관이 건립되어 있다. 특히 문화대혁명 때 한번 죽음을 맛보았음에도 올곧게 자신을 다스린 사람이자 98세 고령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펜을 잡는, 진정으로 학문을 즐기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출처 : 중국의 살아있는 전설, 지셴린의 인생에세이 <다 지나간다>, 허유영역, 청림출판사, 2009년 출간
그의 조부 지라오타이(季老苔), 부친 지스롄(季嗣廉), 모친 조씨(趙氏)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숙부 지스청(季嗣誠)이 그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고등학교부터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외국문학에 대한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18살이 되어 성립 지난고등학교로 전학해 국문학선생님 뚱치우팡(董秋芳)선생을 만나게 됐다. 그는 뚱선생과의 만남을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이 시기부터 번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0년 칭화대학(淸華大學)의 서양문학과에 입학 독일어를 전공했다. 당시 저명한 학자들인 우푸(吳宓)、예꿍차오(葉公超)로부터 동서양 시문학 비교와, 영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선택과목으로 천인꺼(陳寅恪)선생의 불경번역문학 및  주광첸선생으로부터 문예심리학, 위핑보(兪平伯)교수로부터 당송시사(唐宋詩詞)와 주즈칭(朱自淸)으로부터 타오위엔밍의 시를 공부했다. 이들은 당시 중국 최고의 지성들이었다.
친구들도 좋았다. 우즈상(吳組湘)과 린껑(林庚)、리창즈(李長之)와 지센린은 ‘4총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친구 중에 중공의 이론가 후차오무(胡橋木)도 있었다. 그는 ‘순수시’를 좋아했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대학재학 시절은 성적이 뛰어나 고향 칭핑(淸平)현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1935년 9월 칭화대학 문과대학과 독일정부와 대학원생 교환협정서가 체결되고 독일에 가서 3년간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지셴린이 획득하고 그는 독일로 갔다. 독일의 베를린과 미국을 오가면서 향후 중국의 외교부장을 지낸 차오콴화(喬冠華)와 교유했다.
10월 괴팅겐이 도착해 유학생 장용(章用)、텐더왕(田德望) 등을 만나게 됐다. 1936년 봄, 지셴린은 산스크리트어를 선택했다.
지셴린은 괴팅겐 대학 산스크리트연구소에서 인도학을 전공하고 산스크리트어와 팔리문(巴利文)을 공부했다. 영국언어학, 슬라브언어학을 부전공했고, 유고슬라비아어를 공부했다. 지셴린의 스승은 ‘산스크리트어’ 강좌의 책임자이자 저명한 산스크리트어 학자인 발트 슈미트(Wald Schmidt)교수로 그의 강의를 듣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한 학기동안 40 시간을 지센린은 부지런히 공부했다. 불교전적 <대사(大事)>의 두꺼운 3권의 큰 책은 산스크리트와 혼용되어 작성되어 있었고 읽고 쓰기에 온갖 노력을 다했다.
1940년 12월부터 1941년 2월까지 지셴린은 논문답변과 인도학, 슬라브언어, 영어시험에서 4개 “A”를 받았고 박사학위를 획득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귀국할 방법이 없어서 괴팅겐에 남아있게 됐다. 10월 괴팅겐대학의 한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됐고 동시에 불교공부와 산스크리트어를 계속 연구했고 <괴팅겐과학원원간>에 여러 편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1945년 10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스위스를 거쳐서 귀국길에 올랐다. 1980년 괴팅겐을 떠난 지 35년 만에 지셴린은 중국사회과학원대표단을 이끌고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83세가 된 은사 발트 슈미트(Wald Schmidt) 은사를 만난 것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이후 지셴린은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 <다시 돌아온 괴팅겐>이라는 글을 쓰게 됐다.
1946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해 남경을 방문했고 친구 리창즈를 다시 만나고 리창즈의 소개로 산문가 량스치우(梁實秋), 시인 쟝커쟈(臧克家)를 만나게 됐다. 난징에서 칭화대학 시기 은사 천인꺼를 배알했고, 그의 추천으로 베이징대학교에 교수가 됐다. 그리고 난징의 베이징대학 대리총장인 푸스녠(傅斯年)을 만났다. 베이징으로 돌아가 북경대학 문과대학학장인 탕용통을 만나게 됐다.
1946년부터 1983년까지 베이징대학 동방언어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을 역임했고 베이징대학에 이 학과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했다. 동료 중에는 아랍어학과의 마젠(馬堅)과 인도학자 진커무(金克木) 등이 있었다.
 1956년 2월에 중국과학원철학사회과학부 위원에 임명되고 중국문화사절로 인도, 미얀마, 동독,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 등을 방문했다. 문화대혁명시기 ‘4인방’과 베이징대학의 ‘앞잡이들’의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na)>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고대인도 언어와 동양철학, 불교문화 등을 연구하며 문학, 문화, 예술, 철학, 종교에 관한 전집을 저술했다. 그는 1978년 복권됐다. 이후 계속해 베이징대학 동방어과 학과장을 역임했고, 베이징대학 부총장을 역임했으며, 베이징대학남아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그는《지셴린문집》24권을 남겼다. 저서로는 [인도고대언어논문집] [라마야나 연구] [대당서역기교주] [천축심영] [낭윤집] 등 500종이 넘으며, 중국도서상, 국가도서상, 루쉰문학상, 파드마 부샨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한국에도 그의 작품이 소개됐다. 2004년에 소개된 『우붕잡억』(2004), 지셴린 지음, 이정선 김승룡 옮김, 미다스북스과 지셴린의 인생에세이 <다 지나간다>(2009), 허유영역, 청림출판사가 있다. 특히 학문에 대한 그의 한결같은 열정은 2002년 SBS 다큐 [세계의 명문대학 - 다이하드, 죽도록 공부하기 편>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마지막 멘트를 재인용하고자 한다. “거기 한 평생 오직 학문에만 정진해온 하나의 전설이 숨쉬고 있었다. 세상에 참으로 많은 공부가 있지만 진정한 가치, 진정한 경쟁력을 가진 공부는 머리가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좋아서 하는 공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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