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스승과 제자, 그리고 행복 (4)
[현대일보 칼럼] 스승과 제자, 그리고 행복 (4)
  • 이상철
  • 승인 2018.06.1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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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어려서 스승은 맥스 탈무드였다. 맥스는 10살인 아인슈타인에게 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을 가르쳤다. 맥스는 6년 간 아인슈타인을 지도하면서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아인슈타인 가족과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이 우리는 누구나 도움이 없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성공도 혼자 할 수는 없다.

헨리 포드의 자동차 발명(1908)은 그의 멘토르인 발명왕 에디슨 때문에 가능했다. 포드(1863년 출생)가 16세 연상인 에디슨(1847)을 만나 자신감과 격려를 통해 자동차를 발명하기 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를 격려해 주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포드의 구상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포드는 거듭되는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자동차에 대한 꿈을 접을 생각까지 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던 포드는 에디슨을 만나 격려와 칭찬의  말을 들은 것이 그의 인생에 전화점이 됐다.

에디슨은 포드의 구상을 듣고 그를 격려 했을 뿐 아니라 그에개 확신과 신념을 불어넣어 줬다.

에디슨은 포드의 자동차에 대한 구상을 듣자마자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고 주먹으로 탁상을 치며“당신은 이미 해냈다(you've got it)”고 격려와 신념을 심어 줬다. 이후 에디슨과 포드의 우정은 계속됐다. 1885년 에디슨은 플로리다 주에 집을 사서 겨울에는 거기서 지냈다. 이에 포드는 에디슨 집 바로 옆에 집을 사서 살면서 평생토록 서로 우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았다. 

나 역시 내가 평생 존경하고 잊지 못하는 스승이 있다. 나는 중앙대학교애서 학부는 법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신문학을 전공(석사)했다. 내가 존경하는 교수는 신문학과의 곽복산 이었다.

곽복산은 1930년대 일본 상지대에서 신문학을 전공했고 1947년 언론인 양성을 위한 조선신문학원(1952년 서울신문학원)을 설립했다.

6개월 과정으로 입학자격은 대학 졸업자 또는 졸업 예정자였다. 그는 1954년 홍익대학에 최초로 신문학과를 설립해 정규교육을 시작했으며 최초의 신문학 교수가 됐다.

그 후  그는 1957년 중앙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2번째로 신문학과(그 후 신문방송학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로 명칭을 변경)를 설립했다.

중앙대학의 신문학과 설립 당시 교수진은 곽복산, 임근수, 최준이었다. 1962년 홍익대학의 신문학과가 폐과 되면서 중앙대학의 신문학과가 최초의 자리를 계승하게 됐다. 1964년에는 중앙대학과 이화대학이 신문학 석사과정을 개설했다.

내가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신문학)를 받은 것은 1969년 11월 이었다. 곽복산은 1959년 한국신문학회(현 한국언론학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     했다.

1960년에는 이화대학이 3번째로 신문학과를 개설(이해창)했고, 1963년에는 한양대학이 4번째로 신문학과(박유봉)를 개설했고, 1965년에는 고려대학이 5번째로 신문학과(오주환)를 개설했고, 1966년에는 경희대학이 6번째로 신문학과(한병구)를 개설했고, 1967년에는 성균관대학(장을병)과 서강대학(존 미첼)이 각각 7번째와 8번째로 신문학과를 개설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연세대학이 9번째로 신문학과(서정우)를 개설했고 1975년에는 서울대학이 10번째로 신문학과(김규환, 임근수, 박유봉)를 개설했다.

이 무렵 임근수와 박유봉 교수는 각각 중앙대학과 한양대학으로부터 서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대학이 1968년 설립한 신문대학원(김규환)은 신문학과에 통합됐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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