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 할머니를 둔 中 물리학의 권위자
안동 김씨 할머니를 둔 中 물리학의 권위자
  • 한인희
  • 승인 2009.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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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세계적 물리학자 위안쟈리우 (상)

위안쟈리우는 화교 물리학자다. 그는 청말 민국초의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손자였다. 부인인 우젠슝(吳健雄)은 미국이 원자탄을 제조했던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 물리학자였다. 이 부부는 평생을 ‘잉꼬부부’로 살았다.
특히 위안쟈리우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인물로 과학적인 성취가 대단했다. 아마 그가 노벨상을 받았다면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인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의 할머니가 한국인이었고 안동 김씨였기 때문이다.  
위안쟈리우는 1912년 4월 5일 허난(河南省) 안양(安陽)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 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인 위안스카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할아버지의 정치적 경력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당시 최고의 권력자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 위안스카이는 독재자로 평가받았고, 반동적인 정치로 중국인의 원성을 사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위안스카이는 허난성 샹청(項城)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우창칭(吳長慶)의 막하에 들어가, 1882년 우를 따라 조선에 부임했다. 조선 궁정의 전쟁에 개입했고, 1884년에는 이홍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 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가 되어 서울에 주재하며 조선의 내정 ·외교를 조정 ·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부식(扶植)하고 일본에 대항했다.
현재 명동의 중국대사관은 이때 터를 잡은 곳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한 뒤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고 무술변법을 실패로 만들었으며 1900년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고, 1911년  신해혁명 발발했을 때 청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임시총통에 취임해 독재체제를 확립했던 인물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정실부인 우씨(于)외에도 9명의 첩이 있었다. 흥미로운 일은 그의 첩 가운데 1/3이 한국인이었다. 중국말로 정식 첩을 이타이타이(姨太太)라고 부른다. 위안스카이의 첩 가운데 두 번째인 이이타이타이(二姨太太)는 조선 사람으로 이씨였다.
사연은 이랬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파견 나가 있을 때 조선왕비 김씨의 여동생을 첩으로 삼았었다. 그녀를 위해 두 명의 시녀들을 김씨와 함께 보냈다. 그들은 이씨와 오씨였다. 위안스카이는 첩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에 시녀였던 두 사람을 모두 첩으로 격상시켰다.
조선인 3명은 모두가 첩이 되면서 이들의 나이 순서대로 각각 2번째 첩, 3번째 첩, 네 번째 첩이 되었다. 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았던 이씨가 두 번째 첩이 되고, 원래 첩이었던 김씨가 세 번째 첩이 되었고, 나머지 오씨가 네 번 째 첩이 되었다. 두 번째 첩이었던 이씨는 위안스카이와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았고, 세 번째 첩이었던 김씨는 조선의 귀족집안 출신으로 원래는 위안스카이의 정실이 될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명문귀족이면서  첩이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녀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다. 그녀는 위안스카이와의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다. 2남 3녀였다. 그녀의 두 아들은 커원(克文), 커량(克良)이었다. 딸은 셋을 낳아 하나가 죽고 두 명이 생존했다.
바로 커원의 아들이 물리학자 위안쟈리우이다.  네 번째 첩은 운이 좋았다면 비빈으로 책봉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1남 3녀를 낳았지만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直隸總督) 시절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배경을 갖고 있는 위안쟈리우는 아버지 위안커원(袁克文)은 야심이 컸던 형님 위안커팅(袁克定)과 거리를 두기위해 천진으로 이사했다. 천진과 상해는 문화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러나 위안씨 집안의 모든 비용은 형님인 위안커팅이 지불하고 있었던 관계로 위안쟈리우는 베이징으로 가서 큰아버지께 예를 갖추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반항심이 생겼고 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커졌다. 큰 아버지는 수구파적인 인물이었다.
13살이 된 위안쟈리우는 천진의 교회학교에 입학을 했고, 한 달 뒤 영국런던선교회가 설립한 신학서원(新學書院)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위안쟈리우는 과학에 대한 계몽교육을 받게 되었다. 때마침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으로부터 초빙된 하트박사의 물리학 수업을 듣고 물리학에 매료된다. 1930년 위안쟈리우는 베이징의 옌징(燕京)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중국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인 씨에위밍(謝玉銘)교수를 만나게 된다. 당시 그는 무선전기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다시 대학원에서 2년간을 더 공부해 1934년에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졸업을 한 뒤 위안쟈리우는 탕산(唐山)에 있는 광산에서 1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옌징대학의 총장이었고, 이후 미국의 주중국대사가 되었던 존 레이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총장이 무선전기를 좋아하는 인연으로 위안쟈리우를 알게 되었다.
그는 위안쟈리우에게 미국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줌으로써 위안쟈리우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36년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위안쟈리우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절약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의 공부는 장학금으로 대부분 해결되었지만 절약은 몸에 배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는 여객선을 탔다. 당시 배로는 미국까지 20일이 걸렸다. 그는 미화 40불만을 가지고 배를 탔다. 싼 3등 칸 좌석을 샀기 때문에 좌석은 혼절할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다. 그는 1달러짜리 죽 한 그릇도 돈이 아까워서 사먹지 못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체중이 10여kg이나 빠졌고, 돈은 25달러가 남아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위안쟈리우는 버클리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첫 학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9.18사변을 일으키자 미국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되면서 중국인들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 재입학 신청해 밀리컨(Robert Andrews Millikan)교수로부터 입학허가와 장학금에 관한 답장을 받고 다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밀리컨교수는 192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대단한 학자였다. 밀리컨교수의 위안쟈리우에 대한 총애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5년 만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위안쟈리우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핵물리의 여황제’라 불렸던 부인 우젠슝(吳健雄)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쟝쑤성 타이창(太倉)현 출신이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저명한 학자인 후시(胡適) 선생을 연모한 적이 있다. 그녀가 17세 때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었다. 이러한 사랑의 이야기는 <두 번째 악수(第二次握手)>라는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우젠슝과 위안쟈리우가 미국에서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1936년 8월 어느 날 위안쟈리우를 방문한 우젠슝은 원래는 동부지역에 가서 공부하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어 버클리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물리학을 전공으로 결정하고 1942년 5월 30일 밀리컨교수의 주례로 결혼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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