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밤의 황제에서 “中 권력의 핵심속으로…”
상하이 밤의 황제에서 “中 권력의 핵심속으로…”
  • 한인희
  • 승인 2009.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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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조폭계 최고 우두머리 두웨성(杜月笙)

두웨성(杜月笙)은 1888년 8월 21일에 태어나 1951년 8월 16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근대 중국 상하이의 이른바 ‘칭방(靑幇)’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의 본명은 웨성(月生)이었으나 중국 근대의 최고 석학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장타이옌(章太炎)이 그의 이름을 바꾸도록 제안해 이름은 용(庸), 호는 웨성(月笙)으로 했다.
이는 중국고전 <주례(周禮>의 태사락소(太司樂疏)편에 “서방의 즐거움은 용(庸)이고, 동방의 즐거움은 생(笙)이라 한다”라는 전고에서 비롯됐다.
 그의 고향은 쟝수(江蘇)성 촨싸(川沙)로 지금의 상하이 푸동신취(浦東新區) 다리 남쪽이었다. 두웨성이 겨우 4살도 되기 전 모친과 부친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계모와 외삼촌의 손에 성장했다.
] 그는 꽤가 날 무렵인 14살부터 상하이 16포(鋪)에 있는 훙웬썽(鴻源盛)이라는 과일가게에서 일을 했다. 이때 상하이의 조폭계 사람들을 접촉하게 되면서 도박에 몰두하고 어울려 다니다가 어렵게 마련한 과일가게에서 좇겨나자 다른 과일가게에서일을 했다.
 이때 칭방의 천쓰창(陳世昌)을 두목으로 모시고 조폭계에 입회하게 되었다. 천쓰창은 소동문(小東門)일대의 조폭이었다.
그렇다면 중국 근대의 비밀결사 조직인 ‘칭방’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칭방이란 칭먼(淸門), 안칭방(安淸幇), 칭먼뤄자오(淸門羅敎)라고도 부른다. 칭방의 기원은 청대에 조정이 초기에 쟝수성의 양저우(揚州)에서 베이징 인근의 퉁저우(通州)까지 이르는 이른바 ‘징항(京杭)’ 대운하의 쌀의 운반 권한을 첸(錢), 옹(翁), 판(瀋)씨에게 주면서부터 비롯됐다.
그 이유는 당연히 통치자였던 만주족 청조가 한족을 회유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그 세 성씨를 우두머리로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을 ‘칭방’이라고 불렀다.
칭방의 성격은 조폭과 권력과의 결탁이라는 측면에서 체제옹호의 입장이었다. 즉 안칭방(安淸幇)은 즉 ‘청조를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였다. 그 후 ‘안칭방’의 ‘안’자를 제거하고 ‘청(淸)’자를 ‘청(靑)’으로 고면서 ‘칭방’이 됐다. 이후 ‘칭방’은 설립 초기 권력과의 결탁적 성격을 점차 벗어나게 됐다.
 그 이유는 ‘대운하’와 ‘육로’로의 물류 운반이 상호 경쟁을 하면서 새로운 종사자들간의 갈등과 이들 주변에 부식된 불량배들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각각의 세력권을 형성해 교통노동자, 수공업자, 상점원, 하급경찰관 속에 자신들의 세력을 부식했다. 중화민국이후 그들은 아편굴, 도박장, 창녀촌을 경영했으며 두웨성처럼 정계, 재계에까지 진출해 1927년의 공산당 탄압에 일조를 하기도 했다.
두웨성을 이해하기 위해 칭방의 조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조직은 매우 복잡하고 엄격해 여러 층의 서열로 분리되어 있다. 마치 현대의 조폭이 ‘문신’의 내용으로 서열을 구분하듯이 당시 상하이의 조폭은 항렬과 같은 서열이 있었다.
이들 항렬은 대자반(大字班), 통자반(通字班), 오자반(悟字班), 학자반(學字班)의 순서였다. 그리고 입문하는 자의 의식에 입회하는 사람의 수와 입회인의 직위, 그리고 입문자의 인품 등으로 의식의 격이 각각 달랐다. 그 의식은 네 종류로 최하급의 의식을 소선당(小善堂), 다음은 대선당(大善堂), 그리고 개선문(開善門), 최고급은 폐선문(閉善門)이라고 불렸다. 
두웨성이 두목으로 모신 천쓰창(陳世昌)은 칭방의 ‘통(通)’자 연배였다. 두웨성은 ‘오(悟)’자 항렬을 받았다. 두웨성은 천쓰창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당시 상하이 조폭사회의 최대 거물이었던 후앙진롱(黃金榮)의 공관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당시 상해 프랑스 조계의 최고의 깡패였던 후앙진롱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두웨성은 아편 운반의 책임을 맡으면서 프랑스조계 내의 3대 도박장의 하나였던 ‘꽁싱쥐러부(公興俱樂部)’의 경영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 그의 별명은 ‘아편대왕’이었다.
두웨성은 군벌과 결탁하고 그들의 비호 하에 상하이 아편운반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1925년 7월 회사를 설립하고 독점적으로 프랑스조계 내에서 아편 운반을 책임졌다. 이로써 두웨성은 날이 갈수록 세력이 커져갔다.
그의 서열로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던 상하이 조폭사회의 최고 인물이었던 후앙진롱과 쟝수린과 함께 상하이 ‘3대 조폭 두목’의 지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들 3명의 조폭의 특징은 “후앙진롱은 재산을 탐했고, 쟝수린은 싸움에 일가견이 있었고, 두웨성은 사람을 다룰 줄 알았다”라고 이들의 특징을 구분하기도 했다. 두웨성이 최후의 승리자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결국 ‘인맥관리’였다.
이들 조폭세력과 군벌의 결탁은 혼탁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면서 상호 이득을 챙기는 과정에서 조폭세력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두웨성은 자신의 주사업이었던 도박, 아편, 매춘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군벌 및 저명인사들과의 교류를 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이렇게 해 두웨성은 정치요인과 시인묵객에서부터 영향력있는 사회저명인사들과의 연계는 결국 상하이 밤 세계의 우두머리가 됐다.
두웨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정계요인들을 살펴보자. 먼저 당시 물러난 총통 리위엔홍(黎元洪)과도 인연을 맺고 있는데 리위엔홍의 비서실장이 두웨성에게 “춘신군 문하에는 3천명의 시인 묵객이 있었고, 작은 두씨 집안의 남쪽에는 오척 높이의 하늘이 있다네(春申門下三千客, 小杜城南五尺天)”라는 대련을 보내 아부하기도 했다.
이는 일국의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조폭의 우두머리를 전국시대 말 초나라의 정치가였던 춘신군(春申君)에 비유하기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다. 춘신군은 추(楚)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20년간 강적 친(秦)나라에 대항했던 인물로 식객 3,000명이 모여들 정도로 문화보호자였다. 두웨성을 ‘현대의 춘신군’이라고 추켜세운 것은 아부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두웨성은 당시의 저명인사였던 대학자 장타이옌(章太炎)과 교분을 쌓았고, 명사였던 리양두(楊度)와도 교류했고, 저명한 변호사 친렌퀘이(秦聯奎) 등이 모두 그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27년 4월 두웨성은 조폭 우두머리 후앙진롱과 쟝수린과 함께 ‘중화공진회(中華共進會)’를 조직하고 당시 정치적으로 최고 실력자였던 장졔스(蔣介石)의 주구가 됐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에 타격을 가했다. 전형적인 조폭과 정치권력과의 결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해 당시 상하이의 노동운동의 지도자를 암살하고, 노동운동을 조폭을 동원해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두웨성은 장졔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그 공로로 국민당의 난징(南京)정부가 성립되자 육해공군 총사령부 참의(參議)가 되었다. 이후 상하이 프랑스 조계 공부국(工部局) 중국인위원, 그 밖에 각종 사업 및 단체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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