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中 핵개발에 바친 과학자 부부의 사랑
평생을 中 핵개발에 바친 과학자 부부의 사랑
  • 한인희
  • 승인 2009.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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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핵무기 개발의 아버지’ 첸싼창과 ‘중국의 퀴리부인' 허쩌후이 부부

편지는 봉하지도 않은 편지였다. 편지지는 엷은 남색이었고 간단하게 몇 글자 적혀져 있었다. 서명을 보니 눈에 익숙한 글자였다. 사랑하는 그녀 허쩌후이였다. 첸싼창은 흥분을 가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지내용은 너무도 간단했고, 말도 함축적으로 되어 있었다.
1945년 만 32살이 된 첸싼창은 평생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쓰게 됐다. 아니 실제로는 구애의 편지였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적대국이어서 양국 간 오고가는 편지를 봉할 수 없었다. 글자도 25자(프랑스어)로 제한돼 있었다. 그리하여 첸싼창은 물리학의 이론서를 쓰듯 엄격하게 연애편지를 썼다.
“저는 오랜 기간 통신을 통해 당신께 결혼할 것을 요청합니다. 만약 동의하신다면 회신을 해주시고, 저는 당신과 함께 귀국하길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허쩌후이의 회신이 왔다. 역시 프랑스어 25자로 된 답장이었다.
“당신의 사랑에 감사해요. 저는 당신을 위해 영원히 충성을 다하겠어요. 우리가 만나는 것을 기다리며 함께 귀국합시다.”
1946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첫 봄이 오자 두 사람은 마침내 파리에서 혼례를 치렀다. 퀴리부부는 이들 핵물리학자 신랑과 신부를 축복해주었다. 1946년 여름, 부부가 된 첸싼창과 허쩌후이는 함께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개최된 전후 최초의 기본입자 학술회의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
11년간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친 첸싼창은 프랑스 거주 중국인 가운데 최고의 지위와 생활 조건을 갖고 있었다. 눌러앉아도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을 위해 귀국을 결심했다.
1948년 그는 중국공산당 유럽책임자 리우링이(劉寧一)를 만나 귀국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지도교수  F. 졸리오 퀴리에게 알렸다.
그는 “내가 자주 말씀드렸지요? 과학을 위해 봉사하고, 과학은 인민들을 위해 봉사해야합니다. 당신도 이 두 가지 말을 명심하시고 이것을 중국으로 갖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이 말은 평생 그의 좌우명이 됐다.
마침내 1948년 5월 첸싼창 부부는 6개월 된 딸아이를 안고 프랑스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1949년 3월 어느 날, 갑자기 한 통의 통지서를 받았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에 중국대표로 참석하라는 통지였다. 첸싼창은 들떠있었다. 프랑스에 가서 은사와 지인들을 만나고 방사능 관련 설비들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부에 20만 달러를 요청했다.
그런데 갑자기 4일이 지난 뒤 중국의 권부인 ‘쭝난하이(中南海)’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첸싼창을 기다리는 인물은 중앙통전부의 부장인 리웨이한(李維漢)이었다. 그는 “당 중앙에서는 먼저 당신께 5만불을 지불하겠소”라고 말했다. 이 말에 첸싼창은 조금 화가 났다. 요청한 비용을 다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중국은 당시 경제상황이 넉넉하지 못했다. 사정을 이해한 첸싼창은 마음의 평정을 찾고 ‘중국과학원근대물리연구소’를 설립, 부소장, 소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55년 1월 14일 첸싼창은 총리 저우언라이를 접견했다. 다음 날 마오쩌둥,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쭈더, 천윈, 떵샤오핑, 펑더화이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과 만났다.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는 중국지도부가 원자핵문제에 대한 학습을 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당시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은 “오늘 우리는 초등학생입니다. 격의 없이 원자에너지 문제에 대해 당신들이 강의를 시작하세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중국은 원자핵 준비를 시작했다.
1959년 6월 26일 소련공산당중앙에서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소련은 중국에게 원자탄과 관련된 자료와 모형 제공을 거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8월 23일 소련은 일방적으로 양국 간에 맺고 있었던 신기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소련 전문가들을 철수시켰다.
이른바 ‘중소갈등’의 시작이었고, ‘이념분쟁’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소련인들은 이렇게 비웃었다. “중국인은 20년이 걸려도 원자탄을 만들 수 없을 것이고, 한 무더기 패강철만 쌓아 놓을 것이다.” 이러한 비웃음은 중국과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게 했고 첸싼창이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 가운데 하나였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2시 45분, 마침내 중국의 핵실험이 성공했다. 이로서 중국은 미국, 소련, 프랑스에 이어 네 번째 원자탄 보유국이 됐다. 이른바 ‘자력갱생’이라는 국가 최우선 과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첸싼창 평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첸싼창은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탈 수 밖에 없었다. 국가에 커다란 공헌을 한 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대동란이었던 ‘문화대혁명’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는 허난(河南)성 농촌으로 가서 이른바 ‘4청 운동’에 동원돼 이른바 ‘재교육’을 받았다. 정치투쟁은 ‘나’와 ‘적’만을 구분할 뿐이었다.
어둠을 지난 1978년 떵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이 시작됐다. 떵샤오핑은 ‘중국과학대회’에서 첸싼창을 향해 건배를 제의했다.
“여러분 무척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신들께서는 국가를 위해 뛰어난 공헌을 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이 잔을 올립니다. 당신들께서 더 높이 산에 오르시길 기원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오도록 합시다.”
떵샤오핑은 첸싼창이 정치적 혼란 속에 희생되었던 점을 다시 한 번 기렸다. 떵샤오핑이 추구한 개혁개방정책은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보다는 ‘전문가’와 ‘지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첸싼창은 그간의 중국과 프랑스의 우의와 연구를 평가받아 프랑스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았다. 첸싼창은 1992년 6월 28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난 1999년 9월 중공중앙과 중국정부는 ‘양탄일성(兩彈一星)’ 공훈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중국정부가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이었다. 이 훈장을 받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이는 바로 부인 허쩌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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