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칼럼] 굽힘과 행복 <5>
[현대일보칼럼] 굽힘과 행복 <5>
  • 이상철
  • 승인 201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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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승자인 북부군의 유니언 국가에서는 패자인 남부에 보복을 해야 한다는 원성이 높았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평화의 대통령으로 일체의 보복이 없는 사랑을 선언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링컨은 우선 전시 중에 노예를 해방시켰고(1863.1.1) 재선 취임연설(1865.3.4)에서 “아무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만인을 사랑으로 대해야 된다”는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평화의 연설을 했다.                          
링컨의 이 같은 용서와 사랑의 연설은 불과 340단어로 연설하는데 불과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연설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로 남게 됐다.
링컨은 이 연설을 한 지 41일 만에 이에 불만을 품은 괴한의 총에 맞아 서거했고 미국 역사 상 피살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링컨의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은 미국을 가장 위대한 국가로 발전시킨 계기다 됐다. 미국은 다수의 소수민족 국가이면서도 남북전쟁에서 일체의 보복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인종분열이 없는 국가에 속한다.
한 전문가는 미국의 힘은 아직도 내부결속(internal cohesion)과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문화에서 오기 때문에 앞으로 적어도 1세기는 더 세계무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 할 것이라고 했다. 링컨은 미국서 예수 다음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됐다.
뿐만 아니라 링컨에 대한 책도 예수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톨스토이도 링컨을 예수의 축소판(Christ in a miniature)으로 불렀다. 왜 그럴까? 링컨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다가 순교했기 때문이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은  전쟁 역사상 가장 희생자를 많이 낸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1차 대전에서 항복을 한 독일에 대한 보복과 징벌은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1차 대전은 1871년 통일 후 급격히 세력을 키운 신흥 강국 독일이 기존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대결하며 발발했다.
기존 3대 강국은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하며 3국 협상이라는 협력 체제를 구축해 급부상하는 독일을 견제하려 했다. 반면 독일은 발칸반도에 영향을 끼친 오스트리아, 아프리카 진출을 노리던 이탈리아와 손잡고 3국 동맹을 맺었다.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1914년 6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세르비아계의 한 청년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리난트 부부를 총으로 쏘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을 포고했고 세르비아의 후견국인 러시아가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을 선포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 편에서 참전해 유럽의 전쟁이 소용돌이에 빠지게 됐다.
전쟁의 장기화(4년4개월, 1914.6.28-1918. 11.11)와 궁핍으로 1917년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전쟁은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독일은 전쟁의 패배와 함께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자 돈을 무한정으로 찍어 내 경제가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독일에선 베르사유 체제를 거부하는 히틀러가 등장해 1933년 정권을 잡았고 후일 2차 대전을 일으키게 됐다. 2차 대전은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으로 발발했다.
2차 대전 연합국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1943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회동을 갖고 무조건항복원칙(unconditional surrender doctrine)을 발표했다.
이 원칙에 의하면 세계평화는 독일과 일본군의 완전한 파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무조건 항복의 원칙은 1차 대전의 교훈 때문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 지도자들은 1차 대전 때 독일군은 전선에서 패하지 않았으나 후방에서 민간 정부가 항복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말하기를 거의 모든  독일인들은 1차 대전에서 항복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이번 전쟁에서만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할 것이며 일본도 마찬 가지라고 했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사용한 것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해 전쟁을 치를 경우 백만 이상의 미군병사가 희생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 것은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미군병사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1942. 20억 달러)에 의해 원자탄을 세계최초로 제조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이며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역인 헨리 스팀슨은 원자탄 사용은 인류에 돌이킬 수 없는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을 반대했다.
아인슈타인도 일본에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스팀슨의 말대로 미국이 원자탄을 사용한 것은 계속해서 도덕적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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