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 중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문명비평가, 린위탕 下
<중국, 중국인> 중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문명비평가, 린위탕 下
  • 한인희
  • 승인 201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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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느낀점을 써야  식견이 있고 힘이 있다”

3,.18참안 이후 귀향 다양한 민족 집필활동 
美 이주 ‘내나라 내국민’출판 中역사 서방 알려
3차례 노벨상 추천 전세계 다양한 평가 극찬

 

린위탕은 1926년에 발생한 ‘3.18참안’ 이후 뚜안치레이 정부로부터 수배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1926년 5월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푸젠으로 갔다.
샤먼(廈門)대학에서 문학과 주임 겸 국학원의 비서를 맡았으며 쑨푸위엔(孫伏園), 루쉰 등을 샤먼대학 문학과에서 강의하도록 추천하였다. 그는 이해말 국학원의 경비문제로 총장 린원칭(林文慶)을 찾았다. 그러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더욱이 교직원 가운데 그와 다른 ‘현대평론파’의 세력이 부단히 성장하는 상황이었다. 린위탕은 비록 루쉰 등 진보적인 교수들의 지지를 받고는 있었으나  교무 인사 등에서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
1927년 봄, 샤먼대학의 학생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을 받자 결국은 푸젠을 떠나고 말았다. 3월 국민당정부의 외교부장인 첸요우렌(陳友仁:Eugene Chen)의 초청을 받고 우한의 국민정부의 외교부 비서를 맡았다. 이 시기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때였다. 곧 이어 4월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발동하였다.  당시 국민당은 우한의 좌파와 난징의 우파가 국부 손중산의 정통성을 놓고 갈등하고 있던 터였다.
이 해 7월 난징과 우한의 국민당이 통합하였다. 그러자 왕징웨이(王精衛)는 공개적 반기를 들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린위탕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카이밍(開明) 서점으로 부탁을 받은 『개명영문독본』을 출판하여 공전의 히트를 쳤다. 많은 돈을 벌었다.
12월에 루쉰이 상하이에서 『어사(語絲)』를 출판하고 이어서 『분류(奔流)』, 『조화주간(朝花週刊)』의 편집장이 되었다. 린위탕은 이들 간행물에 투고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1928년 11월 린위탕은 극본 「자견남자(子見南子)」를 『분류』에 발표하였다. 이 극본은 공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해 12월 영문 잡지, 『중국평론주보(The China Critic)』에 「루쉰」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중국 사상계, 문화계에서 루쉰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한 뒤 꼼꼼하게 평가를 하였다.
장제스의 이른바 ‘4.12’ 반혁명 쿠테타 이후 린위탕은 중국에서 자신이 바라는 서방 사회의 ‘민주’와 ‘자유’를 실현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1931년 ‘9.18’사변 이후 장제스가 ‘외적에게 타협 투항적’이고 대내적으로 반혁명 군사적인 ‘공산당소탕’과 ‘문화소탕’의 정책이 강화되면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가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식인들 가운데 루쉰을 대표로 하는 혁명문예에 관여하던 인물들은 중국공산당에 투신하고 ‘좌익작가연맹’을 결성하여 국민당 지지자들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린위탕은 루쉰과 사상적으로 결별할 수 밖에 없었다. 루쉰 등은 “린위탕이 투쟁의 외곽에서 의기소침하고 혁명과는 상반된 길을 갔다”고 평가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린위탕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도피하고 은둔하려고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1932년 9월 린위탕은 『논어(論語)』(반월간) 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창간호에서 명확하게 이 잡지의 목표를 ‘유머’에 두겠다고 밝혔다. ‘웃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33년 1월 린위탕은 ‘중국민권보장동맹’에 가입하였다. 1933년 12월 8일 상하이의 어느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은 아무것도 모른다. 대학을 다니면 무엇이든지 안다고 생각한다. 졸업한 뒤 비로소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중년이 되면 다시 뭐든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면 일체를 몰랐다는 것을 비로소 깨닳는다”라고 페이소스 섞인 유머를 곧 잘하였다. 루쉰은 린위탕이 주장하는 ‘유머’문학에 대해 비판하였다.
루쉰은 민족적인 위기가 날이 갈수록 엄중하고 계급투쟁이 첨예한 이때 민중들은 살길을 찾기에 동분서주하는데 한가하게 ‘유머’ 문학을 주장하는 것은 ‘마치 정치적으로 살육을 감행한 자가 많은 사람 앞에서 웃는 형색’이라는 뜻으로 비난을 가하였다. 그 밖에도 여러 차례 린위탕을 비난하였지만 린위탕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인간세(人間世)』가 창간되자 곧바로 루쉰은 린위탕과의 관계를 단절을 하려는 듯 린위탕을 실랄하게 비판을 가하였다. 비판의 내용은 린위탕이 마치 “중국과 서양을 넘나들면서 주인과 노예의 경계에 서있는 ‘서양의 개자식’에 불과하다”고 비난하였다.
1936년 8월 민족적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린위탕은 저작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린위탕은 영문으로 『내 나라, 내 국민(My Country, My Peoples)』을 뉴욕에서 출판하고 이 책을 통해 중국의 역사와 중국 민족에 대해 서방세계에 알렸다. 이 책은 린위탕이 소위 말하는 ‘8백년의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역사순환론’과 중국인의 특성을 ‘속물근성’, ‘참을성’, ‘무관심’, ‘교활함’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어쩐 이들은 중국인들을 왜곡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주로 국내외 혁명 작가와 진보적인 인사들이었다. 이후 미국에서 장편소설 『순식경화(瞬息京華:Moment in Peking)』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1900년 이후 베이징의 한 봉건가정을 배경으로 한 영문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내에도 소개되었다.
1964년 영문소설 『자유성에서의 도피(逃向自由城:The Flight of Innocents)』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중국 공산혁명에 대한 비난과 저주를 퍼부은 소설이었다. 미국 생활에 정착한 린위탕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아울러 이 학교의 ‘중국강좌’를 책임지고 있었고 대대적으로 중국의 ‘고유한 문화’를 선양하였다. 이후 린위탕은 장기간 미국에 거주하였다. 1943년 일본과의 항전시기 충칭을 다녀갔으며 청소년들에게 『역경』을 읽도록 권고하였다. 1947년 국민당정부의 추천으로 유네스코의 예술문학 분야 책임자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1966년 6월에는 미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린위탕은 말년에 비록 고향은 공산화가 되어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고향 장저우(漳州)와는 해협 하나로 가까운 대만에 거주하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대만인들의 선조들은 대부분은 푸젠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푸젠과 혈연과 풍속이 같았고 언어도 같았다. 아마 그래서인지 린위탕이 대만에 거주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리라. 사실 린위탕이 대만을 선택하기 전에 많은 문자에서 민난어(閩南語)와 민난 문화의 요소들을 융합시켰다. 그의 자전체 소설 『뢰이보잉(賴柏英)』에서 첫사랑 여자 친구를 회상하면서 쓴 소설이었다. 대만의 중국문화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67년에는 홍콩중문대학의 연구교수가 되어 사전의 편찬 작업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1972년 『린위탕당대한영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린위탕이 대만에서 살았던 타이페이의 집은 양밍산(陽明山)으로 올라가는 산길 왼쪽에 타이페이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있다. 지금은 린위탕기념관으로 그의 묘지도 그곳에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먼저 다가오는 것은 중국의 전통 사합원의 천정(天井)이다. 자세히 보면 긴 회랑에는 스페인풍의 나선형의 복도가 나타난다. 이는 린위탕이 중서 문화의 장점을 융합한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건물은 린위탕이 직접 설계를 하였고 그가 생전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린위탕은 일생동안 세 차례나 노벨문학상에 추천되었던 인물이다. 그의 생활의 발견은 미국에서 40쇄를 찍었으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명저이다. 유럽에서는 이 책을 누구나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읽는 책’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린위탕은 자신이 성공하게 된 비결을 글을 쓸 때는 반드시 “마음속에 느낀 점을 써야만 식견이 있고 힘이 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삶은 중국인의 중용적인 삶에 서양인의 실용성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린위탕이 쉐이엔서원과 세인트 존스대학을 다닐 때 늘 전교 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에게 그 이유를 묻자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일생 동안 1등에 올라가길 원하지 않았다”라고 고백하였다. 중국인의 중용의 삶을 읽히는 대목이다.
1976년 3월 26일 홍콩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이 살고 있던 타이페이의 집으로 돌아와 묻혔으며 그가 살던 집은 현재 린위탕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린위탕의 중국 대륙기념관은 푸젠의 장저우(漳州)시 시앙청(薌城)구에 있으며 중국 319번 국도 북측에 린위탕 부모들이 잠들어 있는 후싱산(虎形山) 속 바나나 나무 숲에 자리잡고 있다. 청아하고 고요한 곳이다. 타이페이의 린위탕 고거의 건축 품격을 그대로 옮겨왔으며 2미터의 린위탕의 석상이 있다. 위대한 작가에게 이념의 벽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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