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 중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문명비평가, 린위탕 上
<중국, 중국인> 중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문명비평가, 린위탕 上
  • 한인희
  • 승인 2011.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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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대 중국학과교수

“패배자를 공격하는 짓은 더 이상하지 말아야…”

유년시설 기독교소학교 통해 서양제국주의 경외
해외유학서 고대언어학 연구 귀국후 단평 기고
페어플레이정신 주장통한 진보적 지식인 비판

우리에게 중국 지식인으로 영향을 많이 미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린위탕이다.
그는 중국 문화를 세계에 알렸고, ‘유머’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중국에 소개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문명비평가이자 평화주의자였다. 특히 1937년에 집필한 그의 저서 『생활의 발견 : 영어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으로 <생활의 예술>이 원 제목이다』은 우리나라에서 장기간 베스트셀러였다. 『내 나라, 내 국민(My Country, My Peoples)』등은 중국인이 보는 세계 보편적인 삶과 해학을 알려준 명저들이다.
최근에도 『베이징이야기』로 여전히 한국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린위탕의 원명은 허러(和樂)이다. 대학에 다닐 때 이름을 위탕(玉堂)으로 바꾸었다가 곧 위탕(語堂)으로 바꾸었다. 1895년 10월 10일(청광서 21년 8월 22일) 푸젠성 룽시시엔(龍鷄縣) 판즈춘(板仔村)의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훈장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10살이 되었을 때 꾸량위(鼓浪嶼)에 있는 기독교 교회에서 설립한 소학교를 다녔다. 3년이 지나서 아모이(厦門)의 수원서원(수원서원 : 교회의 구제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가정의 가르침과 학교의 교육으로 린위탕은 어린 시절부터 열성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서양 제국주의를 경외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 부러워하면서 자랐다.
1912년 가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명문 상하이의 세인트 존스대학(聖約翰大學)의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미국 기독교 교회에서 설립한 대학이었다. 그는 대학 4년 동안 중국어와 외국어, 역사학 등을 이수하면서 폭넓게 서방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철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저작들을 섭렵하였다. 또한 린위탕은 당시 이 대학의 총장이던 포트(Francis Lister Hawks Pott, 1864-1947, 중국명 ‘卜舫濟’)와 외국인 교수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선망하였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배워 자신의 몸에 밸 정도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이후 린위탕의 사상의 발전과 생활태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세인트 존스는 나에게 특별하게 영향을 주었다. 나의 장래의 발전에 깊은 감화력을 주었는데 바로 그곳은 나에게 서양문명과 보편적인 서양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을 가르쳐주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1916년 가을, 린위탕은 세인트 존스대학을 졸업한 뒤 학교의 추천으로 베이징의 칭화학교(淸華學校)에서 영어교사와 성경교사가 되었다. 그는 1919년까지 3년 동안 주로 강의하는 일에 매달렸고 열심히 생활하였다. 이 기간 가끔은 당시의 <신청년(新靑年)>잡지에 한자(漢字)에 관한 글을 싣기도 하였다. 이 시기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5·4운동’에 매료되었던 시기였다. 린위탕도  신문화운동에서의 ‘과학’과 ‘민주’의 영향으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열정도 점차 약해지고 감퇴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의 인생의 변화의 시기가 다가왔다. 칭화학교의 규정에 따라 학교 근무 3년을 한 교원에 대해 학교 측이 지원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 있었다. 해외에 가서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린위탕은 191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버드대학 대학원에 입학하고 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일년 만인 1921년 미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프랑스에서 돈을 벌면서 공부하는 것이 붐이었다. 이른바 ‘근검공학(勤儉工學)’으로 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중국노동자청년회’에서 일을 하였다. 돈을 모은 뒤 같은 해 여름 독일로 건너갔고 튀링겐 주의 예나대학(University of Jena)에 들어갔다. 반년 만에 다시 작센 주의 라이프치히대학(University of Leipzig)으로 편입하였고 언어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 언어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23년 이 학교의 언어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같은 해 여름, 베니스, 로마, 나폴리 등을 거쳐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린위탕은 귀국한 뒤 여전히 칭화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1923년 11월부터 시작하여 『천빠오(晨報)』에 기고를 시작하였다. 중국어 고음운의 연구에 대한 글과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등의 시가를 번역하여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1924년 5, 6월 사이에 『유머잡화』, 『산문번역과 유머를 제창하자』 등의 단평들을 기고하였다.
유머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어의 표현인 ‘유머(humor)’는 중국어로는 ‘요우머(幽默)’라고 번역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용어를 린위탕이 1924년에 중국에 소개하고 수입하였다고 믿고 있다. 사실은 이 용어는 중국의 국학대사 왕궈웨이(王國維)가 린위탕이 소개하기 전인 1906년, 『굴자문학의 정신(屈子文學之精神)』이라는 책에서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궈웨이는 처음에 ‘유머’를 ‘어우모야(歐穆亞)’라고 번역하였고, 이에 대한 의미를 ‘인생에 달관한 태도’라고 이해하였다. 이후 1924년 린위탕이 『천바오(晨報)』부간에 이 ‘요우머(幽默)’라고 번역하였고, 현재까지 중화권에서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유머’를 중국에 처음 소개한 이는 왕궈웨이로 이 용어가 중국에 들어온 지 올해로 105년이나 된 용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중국적 유머를 발휘한 인물은 린위탕이라고 할 수 있다.
1924년 11월 베이징에서 『어사(語絲)』(주간)이 루쉰(魯迅) 등에 의해 창간되었다. 린위탕은 이 잡지에 음운학(音韻學)을 연구하여 기고하는 한편 평론을 썼다. 린위탕은 이 잡지에 장기간 기고했었다. 루신과 동료가 되었고, 그와 왕래를 시작했다.
1925년 베이징대학 영문과 교수로 초빙이 되었고, 또한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영문과 교수 겸 교무처장이 되었다. 1925년 이 해에 베이징에서는 이른바 ‘베이징여자사범대학’에 시위운동이 나타나 진보적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학생운동이 발생하였다. 이 해 5월에는 상하이에서 ‘5·30’ 노동자 운동이 폭발하여 전국을 뒤흔들었다.
전국적으로 반제 반봉건의 혁명이 고조되었다. 대혁명의 물결은 루신 등의 영향 하에 린위탕도 정치, 사상적인 혁명에 경도되었다. ‘베이징여자사범대학풍조’에서 그는 학생들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학생들의 시위데모에 함께 참가를 하였고 경찰과 싸우기도 하였다. 동시에 『어사(語絲)』, 『징빠오푸칸(京報副刊)』과 『망원(莽原)』 등의 잡지에 「황당무계한 논리의 황당무계한 논리」, 「명류(名流)를 노래하며」, 「토비(土匪)를 축하한다」 등의 단평, 잡문 등을 발표하여 진보적인 학생들의 투쟁을 성원하였다.
1926년 ‘3·18참안’ 이후 사망한 학생들에 대해 조문을 하고, 『어사』 제72기에 「리우화쩐(劉和珍)과 량더췬(楊德群) 여사를 추모하며」라는 글을 발표하여 데모를 하다가 사망한 학생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도살한 봉건군벌과 이를 부추긴 문인들. 즉 이른바 ‘현대평론’파에 대해 폭로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린위탕이 보여준 봉건군벌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보여준 혁명성을 지적해야할 것이다. 문제는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혁명의 결정적인 시기에 그는 왕왕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5년 11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베이징 시민들은 계속 시위가 이루어졌다. 뚜완치레이(段棋瑞) 정부를 타도를 요구하고 봉천군벌 장줘린(張作霖)의 지위에도 동요가 일고 있을 때 ‘여자사범대학사태’로 잠시 동안 승리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린위탕과 루신의 동생이자 친일파 저우쭈어렌(周作人)과 함께 서방자본주의 계급의 허위의식인 이른바 ‘페어플레이’정신을 내세워, “패배자에 대해서 더 이상 공격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비판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린위탕은 이러한 ‘페어플레이’정신을 ‘어사파’의 공동정신으로 제창을 했을 대 루신으로부터 강력하게 비난을 받았다.
루신은 린위탕에 대해 「‘페어플레이’는 당연히 완행임을 논하며」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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