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 20세기 중국 최고의 서화가, 치바이스 上
<중국, 중국인> 20세기 중국 최고의 서화가, 치바이스 上
  • 한인희
  • 승인 2011.05.16 00:00
  • icon 조회수 2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진대 중국학과교수

목공출신 질시속 노력만으로 빛을 찾다

어려운 농민집안 출생… 목공시절 우연한 기회
후신위엔과의 만남 예술적 재능 꽃피워 나가
‘五出五歸’ 견문 넓혀 톡특한 기본 화풍 형성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은 기념품 가게든, 모조품을 파는 상점이든 혹은 음식점 등에 걸려 있는 중국을 보게 될 섯이다. 만약 그림 중 새우 몇 마리를 그린 그림이 있다면 십중팔구 치바이스 작품이라고 보면 틀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단순 명료하고 순박한 곤충, 꽃, 동물,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을 수 없이 그린 작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싸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의 진품 그림은 7,000만 위안(한화 112억원)을 홋가한다.
그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였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작은 할아버지 밑에서 목공일을 배우면서 틈틈이 그림 공부를 했다. 뒷날 그를 중국 미술의 최고학부였던 베이핑 예술학원의 교수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초빙한 인물은 쉬페이홍(徐飛鴻)이었다. 그를 초빙하기 위해 쉬페이홍은 삼고초려하였다. 마침내 교수직을 맡은 치바이스는 정통 화가들로부터 목공 출신이라는 질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해에 500장 이상의 그림을 그렸고, 일본과 항일전쟁 시기 10년 동안은 만점 이상을 그려냈고, 전각은 3천방 이상을 직접 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노력한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전각가였으며, 서예가였다. 원명은 춘즈(純之), 자는 웨이칭(渭淸), 호는 란팅(蘭亭)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이름을 황(璜), 자를 빈성(濱生), 호를 바이스(白石)라 하였다. 1864년 1월 1일(淸同治 2년 11월 22일) 중국 후난성 상탄(湘潭)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온 가족이 농사와 길쌈을 하면서 삶을 꾸려갔다.
치바이스가 6, 7살 즈음 할아버지는 불을 태우고 난 재 위에 글씨를 써서 손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8살이 되었을 때 그의 모친은 어렵게 만든 돈 몇 푼으로 종이를 사서 쥐어주면서 친정아버지 저우위뤄(周雨若)에게 아들을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외가 집에 도착한 치바이스는 이곳도 일손이 필요한 터라 공부를 할 틈이 없어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그만 두고 말았다. 치바이스는 집으로 돌아와 부친을 도와 소를 먹이고 땔감을 하러 산으로 다녔고 농사를 도왔다. 이때 그는 일을 좋아하는 습관이 들었다. 치바이스는 어려서부터 글씨 쓰는 것과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종이를 살 수 없자 낡은 장부책을 잘라서 그림과 글씨를 썼다. 그는 독서도 좋아했다. 일을 하고 쉬는 시간이면 열심히 책을 읽었다. 이 때 <천자문>을 외웠다. 이렇게 보낸 어린 시절은 그에게 의연하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성격이 길러졌다.
1877년 치바이스가 13살 되던 해 그는 작은 할아버지로부터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배울 때는 어설프고 조잡했지만 일 년이 지나자 마을의 어느 목수로부터 조각을 배우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치바이스에게 나무 조각은 너무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중국의 고전소설과 희곡의 삽화도를 조각하면서 서서히 예술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목기의 도안을 하면서 인물이든, 화훼이든 차이가 분명하도록 작업을 하여 완벽함을 겸비하게 되었다. 역사 인물 이야기를 주제로 한 조각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1877년부터 1888년까지 11년 동안 치바이스는 목공으로 오로지 나무 조각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면서 한편으로 이 기간 회화를 연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그림을 그리거나 전각을 하는 길에 훌륭한 기초를 제공했던 것은 두말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치바이스는 아직 공식적으로 예술가의 삶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전문적인 회화와 전각의 창작의 길을 들어선 것은 1889년인 그의 나이 25세였을 때였다. 이때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그는 농촌에서 어느 집 새댁이 시집을 가면서 그에게 부탁한 침대를 조각하고 있을 때 주인의 소개로 후신위엔(胡沁園)이라는 능력 있는 인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천샤오판(陳少蕃)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진지한 교육자였다. 그리고 치바이스가 예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결정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함께 치바이스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함께 치바이스를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하나하나 신중하게 치바이스를 교육시켰다. 천샤오판은 독서를 책임졌고 후신위엔은 그림을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치바이스에게 훌륭한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를 위해 폭넓게 친구들을 치바이스에게 소개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획사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돈만을 밝히는 이기적인 기획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진정으로 그를 키웠다.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치바이스는 그동안 굶주렸던 학문의 배를 채우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치 주린 배를 한꺼번에 채우듯이 문학 등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문화수준과 능력을 제고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1890년부터 1901년 치바이스는 한편으로는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림을 팔아 집안을 부양하였다. 그는 이미 적지 않은 시정(詩情)이 물씬 넘치고 화의(畵意)가 충만한 그림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그의 <금서지락도(琴書至樂圖)>나 <부상망악도(浮想望岳圖)> 등은 스승과 친구들로부터 찬사가 이어졌다. 이 기간 그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용산시사(龍山詩社)’와 ‘라산시사(羅山詩社)’를 만들고 여러 차례 시를 짓고 읊는 모임인 시회에 참가하였다. 이 기간동안 공부와 창작은 치바이스를 하여금 목공 조각쟁이에서 저명한 화가, 시인, 전각가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다시 말해서 그의 예술 생애의 성격이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
치바이스는 선인들의 장점과 현재 대가들의 장점을 가장 잘 흡수하였다. 그는 선배 화가와 민간 화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시간이 날 때 그들을 찾아가 배우는 것을 게으르지 않았다. 당시 그는 후신위엔에게 화조(花鳥)와 초충(草蟲)을 열심히 배웠고, 수샹카이(蕭薌陔)로부터 인물 초상화를 배웠으며, 탄푸(譚溥)에게서는 산수화를 배웠다. 그는 임모를 계속하면서 실제 생활의 현상을 자세하게 관찰하였다. 언제나 새, 동물, 곤충, 물고기들의 특징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사색, 탐구하였으며 그들의 동작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후 그의 예술상의 독창적인 문호를 열수 있도록 성숙시켰던 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치바이스는 성실한 노동생활의 기초위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예술생활의 길을 개척하였다. 당시 그의 생활조건은 매우 청빈하였다. 그림을 배우는 조건도 매우 힘들었다. 그는 등불이없는 밤에는 솔가지에 불을 밝히고 책을 읽었으며 전각을 연습하기 위해 인장재료를 살수 없자 각이 다닳아버리면 다시 각을 해서 썼다.
치바이스는 1902년부터 1909년의 이 7, 8년동안 이른바 ‘5번 나가고 5번 돌아오다’(五出五歸)를 하면서 중국의 남북 각지를 발이 닿는대로 다니게 된다. 그는 베이징, 시안, 구이린, 우저우(梧州), 광저우, 친저우(欽州), 홍콩, 상하이, 쑤저우, 난징 등 6, 7개성의 주요 도시들과 명산대천을 돌아보게 된다. 이 기간동안 많은 실력이 있고 학문이 높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많은 비적, 명화, 서법, 비첩들을 감상하게 되면서 그는 가슴이 크게 열리고 시야도 다시 넓어졌다.
1909년 늦가을 그는 잠시 돌아다니는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침내 경치가 밝고 아름다운 고향에 살게 되었다. 바로 이곳이 그의 그림과 전각에서 자주 언급되는 ‘치핑탕(寄萍堂)’의 소재지다. 그는 이곳에서 10년을 살았다. 그의 유물 중에 발견되는 것은 적어도 이 시기의 스케치 혹은 공필화의 마오비엔즈(毛邊紙:당지, 혹은 죽지를 가리킴)에 그린 화고(畵稿)가 부지기수였다. 화고는 편지지만한 것으로 어떤 그림에는 벌레 몇 마리, 혹은 새 몇 마리, 어떤 것은 떨어지는 나뭇잎 등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화가의 마음이었다. 각고의 10년을 거쳐 마침내 그의 명쾌하고 자연스럽고 독특한 기본 화풍이 형성되었다.

 <다음 주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