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2)
[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2)
  • 이상철
  • 승인 2019.04.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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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스승, 곽복산

곽복산은 1954년 홍익대학에 한국 최초의 신문학과를 설립했다. 그는 초대 주임교수로 임명됐고 국내최초의 신문학교수가 됐다. 그러나 홍익대학의 신문학과는 1960년 문교부의 대학설치기준 미달로 폐과됐다.

곽복산은 그러나 홍익대학에 신문학과를 창설할 무렵부터 중앙대학에서 신문학을 강의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1957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에 국내에서 두 번 째로 신문학과를 설립해 초대 주임교수가 됐다. 

최초로 설립된 홍익대학의 신문학과가 폐과됐기 때문에 중앙대학의 신문학과가 실질적으로 최초의 신문학과 되었다. 곽복산은 그리고 1969년 중앙대학에 신문방송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을 역임했다.

곽복산은 1959년 한국신문학회를 설힙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 신문학회는 1960년부터 신문학보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1969년부터는 정기적으로 발행했다. 

한국신문학회는 1970년대부터 매스미이어만이 아니라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해 신문, 방송, 출판, 광고, 신문학 이론과 방법 등 다양한 연구분야를 다루게 됐다. 이에 학회의 명칭을 모색하다가 결국 한국언론학회로 확정했다. 

중앙대학교의 법정대학에는 신문학과를 포함해 법학과, 행정학과, 정치학과가 있었다. 당시 나는 법학과에 다녔기 때문에 신문학과가 생소하지는 않았다. 신문학과의 몇몇 학생들과는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법학과를 다녔기 때문에 신문학과의 전공과목은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1962년 대학 일학년 때부터 중대신문 자매지인 영자신문, 중앙헤럴드(Chung-ang Herald)에서 학부의 수습기자, 기자, 펀집부장을 거치고 1974년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까지는 편집국장(4대)겸 총장실 비서직을 겸했다. 

당시 대학의 영자신문은 자신의 대학을 외국 특히 미국에 알리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대학마다 영자시문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서울대학은 서울사대를 포함해 몇몇 단과대학이 영자신문을 발간했다. 연세대학에는 연세매널스(Annals)라는 영자지가 있었고, 이화대학에는  이화보이스(Voice)라는 영자지가 있었고, 외국어대학에는 아구스(Argus)라는 영자지가 있었다.

중앙헤럴드는 당시 미국의 주요 대학신문들과 교류를 통해 미국대학신문을 접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신문기사작성, 편집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주요대학의 대학신문들은 이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간으로 발간하는 대학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나는 대학에서 12년간을 대학신문에 종사했기 때문에 나의  전공이었던 법학과는 점차로 거리가 멀어지고 신문학에 가까워 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대학신문을 통해 어느 대학의 신문방송학과(Journalis

m & Mass Communication)가 수준이 높고 저명한지도 알게 되었다. 

이 무렵인 1964년 곽복산은 중앙대학의 신문학과에 국내 최초로 대학원 석사과정을 개설했다. 나는 대학에서 법학과에 다닐 때 신문학과도 같은 대학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곽복산 교수를 알고는 지냈으나 그가 가르치는 과목을 들었거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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