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0)
[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0)
  • 이상철
  • 승인 2019.03.3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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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다섯 살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동양인 최초로 아이비리그인 다트머스 대학총장을 거쳐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무엇이 되고자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다만 봉사와 헌신에 삶의 가치를 두고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 밥사(밥을 사는 사람)는 왜 변치않는 가치관에 속하는가? 나는 얼마 전 친구와 전화를 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친구와 나는 대학의 비서실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직장 상사(총장)였던 분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상을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내가 그와 식사를 한번 한적이 있느냐 하면서 왜 내가 문상을 가느냐고 했다. 이같이 한 직장에 근무 했어도 위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밥 한 끼 사지 않거나 같이 식사를 한적이 없으면 아주 모르는 사이 같이 푸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밥을 한끼 사거나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먹는 것 그 자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친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식사를 그 만큼 많이 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혼자 먹으면 맛을 모르고 먹거나 외로운 생각 때문에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먹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서로 믿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정을 나누고, 서로 공감하고, 서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예술(art)행위를 의미한다. 

위에서 훌륭한 선생이나 스승이 되려면 엔토르에 가까워 져아 한다고 한 것도 바로 선생이나 스승이 얼마나 자주 제자와 식사를 하느냐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혜민스님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그 곳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귀국해 마음치유학교의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혜민스님이 미국의 대학교수로 있을 때 식사와 관련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동료교수들은 보통 한 학기 말이 가까워 지면 학생들에게 저녁식사를 한번 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그러나 자신은 한 학기에 두, 세번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인근 지역의 불교사원(Buddhist monastry)으로 함께 피크닉(현장교육)을 가기도 한다고 했다. 

이는 진정한 스승리란 자신이 지도하고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보다 식사도 많이 하면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진정한 스승이란 멘토르처럼 자신의 제자들에 보다 가까워 지기 위해 동거동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미국의 대학에서 유학할 당시 나는 나의 지도 교수였던 에드윈 에머리와 같이 5년 간 함께 동거동락하는 사이였다. 그는 한 학기에 적어도 두,세번 이상, 자신이 지도하는 원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도 하고 때로는 함께 식사를 한후 서재에서 수업(세미나)을 하기도 했다.

에머리는 학교에서 멀지않는 곳의 집의 지하에 넓은 서재가 있어서 그곳에서 학생들과 보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세미나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의 서재에서 세미나 수업을 하는데 에머리의 부인인 메리도 함께 참석해 세미나 도중, 다른 원생들과 같이 자연스럽게 세미나 주제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그후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의미있는 세미나 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양인 최초로 하버드 법대의 교수가 된 석지영은 수업은“교수와 제자간에 나누는 대화”라며 이런 쌍방향의 수업을 통해 제자도 교수로부터 배우지만 교수 또한 제자들로부터 제자들 못지않게 배운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승이 있으면 제자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1981년부터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27년 간 재직하면서 14명의 박사학위 제자를 배출했다. 

내가 은퇴한지 2018년 현재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깝게 지내는 제자가 있어 매우 행복하다. 나는 신문방송하과 교수가 된지 1년 후인 1982년 부터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잊지 못하고 스승으로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자가 고영철이다. 고영철은 제주대학교 관광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에서 신문학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내가 고영철을 만나기 전에도 나는 제주도와 불가분의 인연이 있었다. 나는 1979년부터 1981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하기전 까지 미국 하와이 동서문화센터내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를 했다.

내가 연구원으로 근무할 당시인 1980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와 제주대학교(당시 변시민 학장)간의 공동프로젝트가 있었다. 

나는 동서문화센터를 대표해 3개월 이상을 제주도에 머물면서 변시민 학장과 함께 공동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이 프로젝트는 제주대학이 미국 동서문화 센터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아 산아제한에 관한 현장조사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미국에서 학위와 연구생활로 7년간 머문 것 외에 당시 제주도에서 3개월 이상, 머문 것이 타지에서 머문 것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제주도가 나의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1980년 가을학기 초에 제주도에 도착해 크리스마스를 그곳에서 보낸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러니까 내가 고영철을 알게 된 것이 2018년 현재 36년 째 되는 해이다. 나는 그의 석사와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다. 

당시 교수의 월급이 70,80만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고영철은 수업을 들으러 일주일에 한 번 서울에 오면 적어도 비행기 값과 숙식비를 포함해 15만원이 든다는 말을 들었다. 고영철은 서울 유학을 하는 동안 유학비용이 집 한 채 값은 들었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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