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4)
[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4)
  • 이상철
  • 승인 2019.02.17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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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문학원
조선신문학원은 이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설립됐다. 곽복산은 원래 계획했던 신문연구소와 신문과학연구소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자 1947년 2월18일자로 미 군정청 학무국으로 부터 조선신문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비로써 한국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언론학 교육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조선신문학원은 초대 원장인 곽복산이 운영했으나 연희대학교 백낙준 총장, 새한민보 설의식 사장, 홍종인을 비롯해 여러 대학의 교수들과 현역중진 언론인들이 참여했다.
조선신문학원의 교과내용은 우선 실무와 관련이 있는 신문윤리, 신문의 명예훼손, 편집권 문제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문기자의 자질과 교양에필요한 정치, 경제, 법률, 역사, 철학, 노동 문제 등, 광범위한 인문, 사회분야까지 포함해 가르쳤다.
이 신문학원은 1947년 3월 초 처음으로 6개월 과정의 학생을 모집했는데 입학자격은 대학 졸업자 또는 졸업 예정자로 규정한 것을 보면 현재 우리기 생각하는 단순한 학원의 성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기 6개월 과정을 보면 30명 모집에 170명(6대1)이 응시했다. 이를 보면 당시 신문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응시자가 많아 40명을 합격시켰으나 엄격한 수업과 시험을 거쳐 27명만이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교과과정 내용을 보면 신문이나 신문학과 관련된 이론과 실제가 30%, 정치, 경제, 철학 과 같은 기초 사회과학이 50% 그리고 시사영어, 특강 등이 20%였다. 
수업은 야간으로 매일 오후 5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4개월간 진행되었다. 6개월 중 2개월은 신문사와 통신사에 배치해 실습훈련을 받았다. 실습에 나갔던 학생들은 대다수가 그 언론사에 그대로 머물러 기자로 채용됐다. 
2기 부터는 수업시간을 1년으로 연장했고 50명 정원에 300명이 지원했다. 1기 원생들은 중앙여고(황신덕)에서 수업을 했고 2기 부터는 을지로 2가 산업경제신문사 2층 강당에서 실시했다. 
1948년 가을학기 부터는 본과1년 연구과 1년(본과 수료자의 입학)으로 학제를 대학원 수준에 이르도록 했다. 곽복산은 부산 피난시절 제주신문 주필이 됐으나 부정폭로 사건으로 일개월간 구속된 적도 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1950.6.25-1953.7.27)으로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부산 피난시절에도 교육은 다시 계속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까지 6개월 과정의 전수과 와 1년 과정의 본과생을 4기까지 배출했다. 
조선신문학원은 부산 피난 시절인 1952년 서울신문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53년 서울수복 후에는 신문학원에 신문보도 외에 신문영어과와 신문 사진과를 신설했다. 그리고 기성 기자 재 교육을 위한 신문기자 아카데미 강좌와 전국 지방기자 강좌를 실시했다.    
조선신문학원의 1기 입학식은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였렸다. 이 자리에서 백낙준 박사는 새로운 학문으로써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조그만 학원은 지금 황야에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훗날에 커다란 수확을 거두 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곽복산은 그리고 창립 1주년 기념식(1948.4.5)에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강연회를 가졌다. 
서재필은 한국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과거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자리에 한국서는 최초로 모금운동을 벌여 지금의 독립문을 건립했고 한국 신문의 선구자로서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한 서재필은 당시 미 군정청의 최고 고문관으로 서울에 와 있었다. 서재필은 이 강연에서 “저널리즘이 민주국가 발전에 절대 필요하다고 하면서 자신이 독립신문을 만들 때는 종로 네거리에 나가 종을 울리며 나도 신문을 팔았다”고 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 급격히 변함에 따라 1950년대 중반부터 신문학원도 쇠퇴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대적 상황이란 언론사가 기자 채용에 있어서 시험을 통한 공개채용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신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늘기 시작했고, 1950년대 말에 시작된 대학의 신문학과는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의 변화로 인해 학위도 없고 언론사 취업에 도움도 되지 않는 신문학원 시대는 마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곽복산은 1947년부터 1962년 신문학원 교육이 실질적으로 중단될 때 까지 15년간 15기에 걸쳐 많은 언론인과 언론학자들을 배출했다. 
신문학원 출신으로 대학의 언론학 교수로 종사한 인사로는 김동철(1기, 이화대), 팽원순(5기, 한양대), 최종수(광주대)등이 있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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