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
[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
  • 이상철
  • 승인 2019.01.20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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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언론과 동아일보

곽복산은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지 1년 후인 1911년 전남 목포에서 아버지 수천과 어머니 김수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버이를 잃고 5세 때부터 전북 김제 읍의 한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읽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후 기독교계의 사립학교인 영신학교와 소성의숙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다.  

보통학교를 마친 후 15세 때인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의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2년 후인 1927년 4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동아일보의 지방주재기자로 일하게 됐다. 2년 간 지방주재기자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열정과 패기만 가지고는 기자로서 소명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20세 때인 1931년 일본대학입학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일 년 후인 1932년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2년간 와세다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같은 해에 상지대학(소피아 대학)의 신문학과(3년과정)에 제1기로 입학해 1935년 졸업을 했다.  

일본에서는 동경대학이 1929년 문과대학에 최초로 신문연구실을 설립했고 다음으로 상지대학이 1932년 처음으로 신문학과를 설립했다. 

곽복산은 상지대학을 졸업하고 그 대학 연구실에서 잠시 근무한 후 1935년 동아일보에 다시 입사했다. 곽복산은 상지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34년 10월6일부터 16일까지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신문의 과학적 연구에 대하여”라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곽복산에 이어 상지대학을 졸업하고 곽복산과 같이 언론학 교육에 기여한 인사로는 이해창과 박유봉이 있다. 이해창은 이화대학에 신문학과를 설립했고 박유봉은 한양대학에 신문학과를 설립했다. 이들은 상지대학의 선후배 사이로 매일신보에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곽복산의 본격적인 기자 생활은 상지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에 재 입사 하면서 부터였다. 그의 신문과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대단했다. 그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 됐을 때 평양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복간되기만을 고대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이란 1936년 베르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손기정 선수의 기사와 사진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일장기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이길용은 투옥되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길용은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체육부 기자로 활동했다. 이길용은 한국 최초의 체육부 기자로 1927년 다른 신문사의 체육부 기자들과 뜻을 모아 조선운동기자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길용은 다시는 동아일보에 근무하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풀려났고 동아일보는 발간이 재개됐다.   

곽복산은 동아일보가 정간 40일 만인 1937년 7월에 복간되자 이 기쁨을 감출 길이 없어 얼마 후 낳은 아들을 동아일보의 이름을 줄여 “동일”로 지었다. 그 후 1남3녀를 더 두었는데 이들의 이름도 가문의 성씨에 의한 돌림이 아닌 동아일보의 “동”자를 돌림으로 하는 이름(동성, 동임, 동실, 동희)을 지을 정도로 신문을 소중히 여겼고 특히 동아일보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일본 총독부에 의해 1940년 8월10일 지령 6,815호(조선일보는 지령 6,923호)를 마지막으로 강제폐간을 당했다.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일제의 기관지 밖에 없는 신문의 1차 암흑기였다면 1940년부터 해방이 되던 1945년 까지는 신문의 2차 암흑기 였다.

이 결과, 우리의 민간지나 민족지가 없는 일제의 기관지 밖에 없게 됐다. 곽복산은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일을 계속했다. 그는 주로 중국대륙의 각 전선을 순회하면서 종군기자로 취재를 했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이 되자 곽복산은 동아일보 복간 준비위원(설의식, 고재욱, 곽복산)으로 활약했다. 그해 12월1일 신문복간과 함께 사회부장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그러나 조선신문연구소의 창설로 일시 동아일보에서 손을 떼기도 했다. 

그러나 곽복산은 한국전쟁(1950.6.25-1953.7)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 중 제주일보 주필과 동아일보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1952.3-1953.4)을 역임했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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