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인>타이완 출신 첫 노벨상 리웬저(李遠哲) 박사 下
<중국, 중국인>타이완 출신 첫 노벨상 리웬저(李遠哲) 박사 下
  • 한인회
  • 승인 2011.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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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과학자는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타이완 사회개혁 참여 위해 귀국
첸수이비엔 지지 정권교체 1등 공신
개혁실패 정치적 낙후성 면치 못해

리웬저는 1994년 9월 타이완의 사회개혁에 참여하기 위해 당시 국민당의 렌잔(連戰) 행정원장의 초청을 받아들여 귀국하였다.
그는 ‘행정원교육개혁심의위원회(약칭 교개회)’의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행정원교육개혁심의위원회’는 비정부 조직이었다. 당시 타이완은 리웬저의 명망 때문에 사회 각계각층에서 교육개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개위’는 타이완의 해묵은 교육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를 ‘교육개혁에 관한 보고서’에 담아 행정원에 제출 시정에 참고하도록 제공하였다.
2년여의 활동을 마감하고 1996년 12월 ‘교개회’는 자동 해산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개혁안도 실천의지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교개위’의 건의는 당시 타이완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정치적 이익이 서로 각축하면서 왜곡 변질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를 주도한 리웬저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한 예로 타이완의 최대 도시 타이페이와 까오슝(高雄)에서 실시하려던 고등학교 무시험제도가 ‘교개회’의 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여론의 화살은 ‘교개회’로 향하여 비난을 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했다.
개혁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타이완 정부는 여전히 리웬저의 명성이 필요했다. 1999년 9월 21일 이른바 타이완의 ‘9·21대지진’이 발생하였다. 타이완 중부 난터우(南投)현에서 일어난 지진이었다. 한국 표준시로 1999년 9월 21일, 1시 47분에 리히터 규모 7.3의 강도로 일어난 20세기 타이완에서 가장 큰 강도의 지진이었다. 사망자는 2,321 명, 부상자 8,000여 명, 실종자, 57명을 기록하였다.
당시 행정원장이 쑤완창(蕭萬長)은 리웬저에게 ‘9·21재난 복구민간자문단’ 단장을 맡겼다. 이들은 활동을 통해 자문단은 행정원에 신속하게 정부의 각 부회(部會)를 뛰어넘는 국가급 기술자문 및 지원팀을 구성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처럼 리웬저의 역할은 타이완에서 필요한 곳이 많았다. 마치 팔방미인과도 같았다.
리웬저가 타이완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예를 하나 보자. 리웬저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그는 오랜 기간 테니스를 즐겼다.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있을 때 타이완 출신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마이클 창(Michael Stich Chang : 중국명 張德培)과 친했다. 리웬저는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기 때문에 중국인도 테니스를 잘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이완에 돌아온 뒤 리웬저는 타이완에서는 우수한 청소년 테니스 선수가 지원을 받는 것이 어렵다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직접 대기업을 찾아다니며 꿈나무 테니스 선수들을 위한 스폰서를 해줄 것을 건의하였다. 마침내 루옌쉰(盧彥勳), 왕위줘(王宇佐), 짠용란(詹詠然), 장자롱(莊佳容), 세수웨이(謝淑薇) 등의 선수 훈련비를 찬조 받았으며 이후 이러한 선수들이 세계 랭킹 100위안에 들게 하였다.
리웬저에게 언제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타이완 정치에 개입하면서 뉴스메이커로 등장하였다. 2000년 타이완 총통 선거는 오랜 장기집권에 부패한 국민당과 신생 민진당의 대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리웬저는 2000년 3월 5일 “(타이완이) 상승할 것인가 아니면 침몰할 것인가”라는 자극적인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러한 발표 뒤에 선거 직전 3월 10일에 그는 ‘국정고문단’을 조직하여 공개적으로 민진당 첸수이비엔 후보를 지지하였고 박빙의 선거전에서 민진당이 정권을 교체할 수 있도록 도왔던 1등 공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국민당에게는 통한의 순간이었다. 그의 생각은 민진당만이 타이완의 고질병인 ‘부패’와 고리를 끊고 민주화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결국 이리하여 치열한 선거전에서 민진당이 승리할 수 있는 요인을 만들어주었다. 국민당으로서는 통한이었고 민진당으로서는 정권을 교체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2004년 대선에서도 “집권 민진당의 천수이볜(53.陳水扁) 후보가 20일 실시된 제11대 총통선거에서 치열한 대접전 끝에 야당 연합 후보 롄잔(67.連戰)을 2만 9천 518표(0.22%)차로 간신히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패색이 짙었던 천 후보가 타이완의 국내외 관측통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천신만고 끝에 기사회생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86년 타이완 최초로 노벨상(화학상)을 받은 ‘타이완의 양심’ 리웬저(李遠哲) 중앙연구원장이 2000년 선거에 이어 이번에 또 다시 ‘개혁완성을 위해 민진당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며 낙마 위기에 직면한 천 후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개혁지지 세력을 끌어내는데 큰 힘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한국 <연합뉴스> 2004년 3월 20일자)
그러나 이후 첸수이비엔은 부패의 대명사가 되었고 개혁은 물건너갔다. 타이완 사회는 분열을 가속화하여 정치적 낙후성을 면치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타이완에서 가장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하고 다작을 하며 총통선거에도 출마한 인물인 리아오(李敖)가 2005년에 출판한 『리웬저의 진면목(李远哲的真面目)』이라는 책에서 “(리원저는) 좋은 사람이지만 나쁜 일을 하였다” “지도자의 품격을 없고 단지 과학만 할 줄 아는 인물”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리웬저는 반성을 하였고, 타이완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2005년 10월 13일 리웬저는 입법원 과학자문위원회에 출석하여 시정보고 및 질의에 답변을 하였다. 그는 무소속의 입법위원 리아오의 총통에 대한 평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현재 집권자(첸수이비엔)는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정책의 정확도가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정책이 너무 조악하다. 또 다른 하나는 주변 사람들이 청렴결백해야만 한다. 따라서 민진당이 이 두 가지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반드시 국민들을 실망 시킬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리웬저가 민진당에 대해 최초의 불만표시였다. 이후의 정치과정을 보면 그의 예언대로 민진당은 총통과 부인, 아들, 사위가 모두 부패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타이완 정치사에서 총통이 감옥에 가는 불상사를 가져왔으며 정치적 민주화에 찬물을 끼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직도 타이완의 정치는 남북으로 갈려 서로를 비난하고 분열의 과정을 겪고 있다. 마침내 리웬저는 2006년 6월 2일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타이완 정부에 대해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인 경험으로 영국의 액튼 경이 말한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은 국내외에 많은 예가 있다. 따라서 누가 정권을 잡던 간에 이 명언은 명심하기 바란다” 이어서 그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는 과거 수 십년간의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오로지 시험에서 몇 점을 얻었는지를 보고 대학도 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을 뽑는다. 그러나 도덕과 수양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현재 교육의 문제이다” 이어서 2006년 6월 25일 리웬저는 친필로 서명까지 한 네 가지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민주정치에서 집권정당이 교체되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이자 본인의 확고한 신념이다. 본인은 과거 타이완 민주정치와 정당이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표시와 각종 주장을 지금 검토해보아도 여전히 옳앗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진당의 집권이래 정치적 업적은 제한적이었고 부패사건이 적지 않았다. 본인이 통탄하는 것은 민진당이 당의 이상을 견지하지 못하였고 겸손하게 집권도 하지 않았던 점이다. 이 당이 깊이 스스로 반성하고 이후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한다. 타이완이 국제사회의 성원으로 미래를 향해 매진하고 있지만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고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타이완을 보면 장기간 내부 정치투쟁 때문에 정치가 공전되고 2300백만 동포들이 모두 피해를 입고 있는데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각 측이 세계의 화해 조류와 동포들의 화목을 함게 누린다는 현실을 고려하여 타이완 상공의 검은 구름을 함께 걷어내고 찬란한 햇빛이 우리 국가와 국민에게 다시 한번 비춰주길 희망하는 바이다” 훌륭한 과학자가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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