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통해 본 행복과 민주주의
미국 대선을 통해 본 행복과 민주주의
  • 현대일보
  • 승인 2023.02.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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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손쉬운 멕시코 전쟁(1846.5.11.-1848. 3.10)의 승리로 6개 주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아리조나, 콜로라도)를 합병했다. 포크 대통령이 상원에 멕시코와의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 인준을 요구했을 때 일부 상원의원들은 멕시코 전체의 합병을 원해 인준을 반대했다. 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이여, 서부로 가라”고 하는 서부 개척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1848년 1월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 (gold rush) 되자 많은 젊은이들이 이주했다. 1849년 캘리포니아 인구는 10만을 넘었고, 이해만 해도 8만 명이 더 이주했다. 

1848년 대선에서는 휘그당(Whig)의 테일러 (Zachary Taylor, 12대, 1849-50)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멕시코 전쟁의 영웅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년 후 사망(1850.7.9.)해, 부통령인 필모어 (Millard Fillmore)가 두 번째로 13대 대통령이 되었다. 필모어는 1852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극동함대(East Asia Squadron)를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문호를 개방케 했다. 

멕시코 전쟁의 승리는 영토의 팽창과 함께, 정치적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49년까지 미국은 30개 주 가운데 15개 주는 노예주(slave state), 15개 주는 자유주(free state)로 균형을 유지했다. 그런데 테일러 대통령이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천거하자, 남부 주들은 연방 분리(disunion)로 대립했다. 185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피어스(Franklin Pierce, 1853-57)가 노예문제 타협안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타협안에 의하면 캘리포니아는 자유주, 뉴멕시코와 유타는 주민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노예 인구는 남부 주에서 1820년부터 1840년 사이 10배 이상으로 증가해, 미시시피는 38,000명에서 436,000명으로 증가했고, 텍사스는 41,000명에서 435,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들 노예는 남부의 면화 재배 (앨라배마, 미시시피, 텍사스)와 설탕 재배 (루이지애나)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1854년에 제정된 캔자스 네브라스카 법 (해당 주가 결정)은 심각한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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