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에서 장원부인까지… 소설같은 삶을 들여다본다
기생에서 장원부인까지… 소설같은 삶을 들여다본다
  • 한인희
  • 승인 2009.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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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대 최고의 기생 싸이진화<상>

싸이진화(賽金花)는 원래 성씨는 자오(趙)씨였다. 어릴 때 이름은 산바오(三寶), 때로는  링페이(靈飛)로 불렸고 1872년 10월 9일 강남의 쑤저우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원적은 안후이성 후이저우(徽州)로 아버지가 태평천국 시기 쑤저우로 흘러들어와 현지의 여자를 취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첫 번째 싸이진화를 낳고, 다음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녀가 13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양아버지 차오청싸이(曹承璽) 집으로 가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그녀의 원명은 차오몽란(曹夢蘭)이 되었다. 차오집안의 먼 친척 여자의 꼬임을 당해 친화이허(秦淮河)의 배로 팔려와 ‘화선(花船)’의 기생이 되었다.
이때 ‘화선’은 기생을 두고 영업하는 배였다. 이 배는 기생을 고용하기도 하고 고용하지 않는 배도 있었다. 기생이 없는 배는 손님이 기생을 데리고 탈 수 있었다. 이들을 ‘추티아오즈(出條子)’라고 불렀다. 따라서 ‘추티아오즈’는 고정된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술을 따르는 기생이 아니었다.
싸이진화는 이렇게 ‘추티아오즈’로 시작했다. 가족들의 체면을 위하여 이름을 ‘후차이윈(富彩雲)’으로 했다가 나중에는 어머니 성을 따라 푸차이윈(傅彩雲)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 싸이진화는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 1867년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홍쥔(洪鈞)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쑤저우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쥔은 당시 49세로 병부 좌시랑이었다. 그는 시엔펑(咸豊) 황제 시기 학사였던 인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원사보정(元史補正)> 30권을 집필했는데 이는 세계가 공인하는 중국 원사연구의 개척자가 되기도 했다. 그 밖의 홍쥔은 고문자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던 뛰어난 인물이었다.
쑤저우로 돌아온 홍쥔은 15살짜리 기생 싸이진화에게 빠지고 말았다. 그는 많은 돈을 주고 그녀를 사서 첩으로 삼았다.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34살 차이였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베이징에서 삶을 시작한다. 1887년 홍쥔은 싸이진화를 데리고 베이징으로 왔다. 그는 베이징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청정부가 파견하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 4국의 사절 겸 4국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어에 능통했고 러시아도 할 줄아는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하여 홍쥔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간 이들 4개국을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때 자신의 첩인 싸이진화를 대동하고 바다를 건넜다.
그녀의 신분은 하루아침에 천한 기생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공사관의 부인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남편과 유럽을 방문하는 기간 동안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여왕과 단독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즈마르크의 수상 관저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페테르부르그의 짜르 궁전을 방문했을 때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을 방문하는 기간에는 빌헬름황제가 그녀를 접견하기도 했다. 당시의 보도에 따르면 “독일에서 그녀는 자주 베틀리 황후를 찾아가 궁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국제적인 연회 석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고 언제나 젊은 청년장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직접 파티를 열었고, 크게 환영을 받았고, 이로써 공사부인은 독일의 사교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방의 마리아’라고 불렀다. 싸이진화는 남편 홍쥔과 4개국을 방문한 뒤 독일의 베를린에서 4년 정도 살았으며 이 기회에 그녀는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홍쥔은 싸이진화보다 34살이 많았지만 두 사람의 정은 돈독했다. 1890년 홍쥔은 임기가 만료되어 싸이진화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1893년 홍쥔은 귀국 뒤 3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 홍쥔이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참고 지냈던 정실 부인이 24살 된 싸이진화를 집에서 쫓아버렸다.
시집에서 쫓겨난 싸이진화는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 옌펑리(彦豊里)에 ‘짜오멍잉(趙夢鴦)’과 ‘짜오멍란(趙夢蘭)’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기구한 기생의 삶이 시작했다. 그녀의 집 앞에는 인력거와 마차가 줄을 이었다. 영업은 너무 잘되었다. 1898년 여름, 싸이진화는 텐진(天津)으로 왔다. 그녀는 상하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장원 부인의 간판을 내걸고 기생집을 열자 텐진과 탕구(塘古) 일대가 난리가 났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일단의 예쁜 아가씨들을 모집하고 정식으로 쟝펀(江分) 후통에 남방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금화반(金花班)’을 만들었다. 싸이진화는 본인이 직접 영업을 하는 외에도 기직 기생을 하기도 했다.
텐진에서 싸이진화는 정치적 거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호부상서(戶部尙書)였던 수리산(書立山)과 봉강대리(封疆大吏)를 맡고 있던 더샤오펑(德曉峰)이 그들이었다. 수리산은 싸이진화를 베이징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싸이진화는 훙성커잔(鴻升客棧) 내에 머물게 되었다. 텐진의 금화반 기생집은 베이징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때 싸이진화는 자주 남장을 하여 ‘싸이어르신(賽二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00년 8월, 의화단 사건으로 베이징과 텐진 일대가 난리였다.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고 점령한 뒤 중국인들에 대한 보복을 가하고 있었다.
당시 8국 연합군의 독일군 사령관 발더시(Alfred Graf von Waldersee)였다. 그는 중국인 가운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싸이진화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발더시는 사령관의 명의로 “불지르는 일, 죽이는 일, 총질하는 일, 부녀자를 강간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한다!”라는 공고를 내걸었다. 발더시는 싸이진화와의 관계로 중국인들에게 군량미도 덜 거두고 부대에 명령하여 함부로 중국인들을 죽이거나 하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녀의 덕분이었다.
싸이진화는 말년에 친구에게 서태후가 시안(西安)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그녀가 베이징을 지키는데 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 차례 입궁하도록 했다.
서태후가 그녀에게 보석 등과 같은 귀중한 물건들을 상으로 주었다. 서태후는 그녀에게 궁으로 들어와 서양에 관한 일을 하도록 했으나 그녀가 황궁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해서 거절했다.
당시 베이징의 기생집에 대한 상황을 살펴보자. 건륭(乾隆)년간부터 1949년까지 베이징의 싼시항의 기생집은 모두 청음소반(晴陰小盤)이었다. 청음소반은 몸을 파는 곳일 뿐만 아니라 손님과 차를 마시고 주연을 열고 금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과거 베이징의 기생집은 ‘남반’(南班)과 ‘북반’(北班)을 구분되어 있었다. 남반은 양조우(揚州),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일대의 여자들이었다. 이들은 비교적 문화적 소양이 높았고, 시서화를 잘했고 요리 솜씨도 뛰어났다. 황하 이북의 ‘북반’과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최고의 기생이었던 싸이잉화(賽鴦花), 샤오펑시엔(小鳳仙)은 모두 남반이었다(샤오펑시엔이 있었던 雲古班은 섬서항 22호로 지금의 섬서항여관 자리이다) ‘8대후통’ 내의 쓰터우(石頭) 후통의 쑤바오바오(蘇寶寶)와 씨에싼싼(謝珊珊)은 모두 당시 강남 최고의 명기들이었다.
싼시깡 내에는 술집, 약국, 차관, 아편관 등이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양원일당(兩院一堂)‘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참의원과 중의원, 그리고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지금의 북경대학)이 모두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명문거족의 자제들 예를 들면 위엔스카이(袁世凱)의 둘째 아들, 위엔커원(袁克文), 명사 량두(楊度), 운남도독 차이어(蔡鍔), 사천도독 이창헝(伊昌衡)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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