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세계의 앞에 가야합니다!”
“중국이 세계의 앞에 가야합니다!”
  • 한인희
  • 승인 2009.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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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첸쉐썬<하>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첸쉐썬은 미국 내 항공과 미사일 연구 분야에서 더욱더 뛰어난 업적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8월 첸쉐썬은 중국으로 귀국할 마음을 굳혔다.
그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했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미국을 휩쓸던 메카시 선풍이었다.
대체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미국에서는 냉전의 영향으로 소련의 간첩과 미국 내 기관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을 크게 두려워하던 시기였다.
원래 매카시즘(McCarthyism)이라는 말은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 공화당 당원집회에서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계기로 ‘마녀사냥’처럼 일어난 반공주의 광풍에서 유래한다. 중국인 첸쉐썬도 이를 비켜갈 수 없었다.
첸쉐썬은 1935년 미국 유학을 시작한 이후 10년간 연구를 통해 당시 미국 내 최고의 미사일 전문가였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탄 프로젝트인 ‘맨하턴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카시선풍이 불자 미국인들은 첸쉐썬을 의심하고 군사무기 연구 분야에서도 소외를 시키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미국인들의 이러한 태도 크게 실망했다. 마침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이렇게 의심을 받고서는 계속 미국에 살 수가 없어!”라고 결심했다.
첸쉐썬의 귀국선언은 미국정부를 긴장시켰다. 미국의 해군부 차관은 직접 미 법무부에 전화를 걸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첸쉐썬의 귀국을 막아야 합니다. 그의 가치가 너무 높습니다! 그의 가치는 5개 해병대 전투 사단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미국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첸쉐썬은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암담한 시절이었다. 귀국 선언으로부터 귀국을 하는 1955년 9월까지 5년간의 연금생활이 계속됐다. 그는 무료함을 부인 장잉과 음악으로 해소했다. 그는 대나무 피리를 잘 불었다. 부인은 기타를 켜고 두 사람은 고전 실내음악을 연두하곤 했다. 사실 피리와 기타는 화음이 잘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 부부는 음악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어려운 시기를 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첸쉐썬이 연금을 당한 뒤 어떻게 해서 미국을 벗어나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가? 미국정부가 첸쉐썬을 억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중국으로 전해지자 중국정부는 다양한 통로 통해 첸쉐썬을 구출작전이 시작됐다. 이는 사회주의 신생정부의 범정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중국의 법률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미국인을 억류하고 한국전쟁에서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들을 영공 침략죄로 억류하면서 첸쉐썬 석방을 위한 미국정부와 협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1954년 4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프랑스 등 5개국이 제네바에서 한반도문제와 인도차이나문제로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대표단의 단장은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저우언라이는 회담에서 미국 내에 억류중인 중국인 유학생과 과학자들에 대해 언급했고, 이에 미국인들은 영국외교관을 내세워 중국 측과 소통을 시작했다.
중국 측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협상에 들어갔다. 중국측 대표단의 비서장인 왕빙난(王炳南)은 6월 5일부터 미국대표인 국무부 차관 존슨과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 측은 중국에 억류중인 미국 교민과 군인들의 명단을 제출하고 이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중국 측은 미국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국에 억류중인 첸쉐썬의 석방이 선행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거부했다. 7월 21일 제네바회의는 폐막됐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미국과의 협상을 재개하기 위하여 왕빙난에게 제네바에서 7월 22일부터 미국과의 담판을 재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10여 차례 접촉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초조했다. 그는 이러한 긴박한 중 당시 중국인민대표대회 상임부위원장이었던 천쑤통(陳叔通)으로부터 국제항공우편 한 통을 받았다. 이 친필 편지에는 첸쉐썬이 현재 미국정부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가 저우언라이에게 전달되기 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는 첸쉐썬이 담배를 싼 종이에 깨알같이 편지를 써서 벨기에에 살고 있던 친척에게 보냈다. 그 친척은 천쑤통에게 다시 보냈고, 천쑤통이 저우언라이에게 보내는 릴레이식으로 전달됐던 것이었다. 이 친필편지는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근거로 중국 정부측은 ‘무고한 중국인을 미국정부가 억류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됐고 미국 측의 억류하고 있지 않다는 억지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8월 1일 중미대사급 회담이 재개됐다. 중국측 은 억류 중이었던 미국인 조종사 11명이 7월 31일 베이징을 떠나 8월 4일 홍콩에 도착한다는 내용을 미국 측에 통보했다. 미국 측도 어쩔 수 없이 첸쉐썬을 8월 4일에 석방하는 통지를 보냈다. 이렇게 하여 첸쉐썬은 1955년 9월 17일 부인 장잉과 아들과 딸을 데리고 ‘프레지덴트 클리브랜드호’를 여객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고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첸쉐썬은 이후 한 번도 미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1956년 첸쉐썬은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을 접견했다. 장소는 마오쩌둥의 서재인 ‘국향서옥(菊香書屋)’에서였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저뚱에게 “주석님! 누가 왔는지 보세요!”라고 하자 “아 첸쉐썬 동지!” 마오쩌뚱이 놀라면서 그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마오쩌뚱은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그에게 다섯 손가락을 펴보였다. 미국이 첸쉐썬을 가리켜 말한 5개 사단보다 강하다는 의미였다.
첸쉐썬은 군인계급장을 달기도 했다. 중국 군부는 그의 계급을 어떻게 정할까 고민했다. 하루는 중국의 10대원수 중의 한 사람인 네룽전이 마오쩌뚱의 ‘국향서옥’을 찾았다. “주석님, 소련의 미사일기술 원조를 받기 위한 준비로 소련에 인원을 파견해야 하는데 한번 명단을 살펴봐주십시오.” 이에 마오쩌뚱이 말했다. “사령관, 첸쉐썬 동지와 함께 가세요” 그러자 네룽전이 물었다. “그러면 계급은 어느 정도?” 마오쩌뚱은 “그의 공헌과 자격으로 볼 때 중장급 정도는 되어야 할게요!” 이렇게 해서 첸쉐썬은 공군 중장 계급장을 달고 소련에 가서 기술회담에 참가했다.
이후 첸쉐썬은 중국정부에게는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됐다. 그의 업적은 이른바 ‘양탄일성(兩彈一星)’으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 발사를 주도한 학자로 중국의 국방에 크게 기여한 과학자였다. 특히 1960년 이후 중국은 소련과 정치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소련은 당시 257개의 과학기술협정을 파기하고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켰을 분만 아니라  냉전시기 핵우산으로 지켜주던 중국을 버린 것이었다. 이에 중국은 ‘자력갱생’을 부르짖으면서 안보에 매진했다. 이를 해결해준 인물이 바로 첸쉐썬이며 그가 중심이 되어 1964년 10월 16일, 중국 최초로 원자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원자핵실험 성공기념 만찬장에서 마오쩌뚱은 첸쉐썬을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첸쉐썬은 중국 안보에 대한 공헌이 지대함에도 그는 한번도 부를 쫓지 않았다. 그는 국가가 배려해준 항공항천연구원 작은 집에서 부인과 평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금년 10월 31일 향년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 병석에 있는 동안 국가주석 후진타오가 병문안을 했고 특히 원자바오 총리는 4차례나 그를 문안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병문안을 온 총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중국이 세계의 앞에 가야합니다!” 그는 중국이 더욱 강성한 나라가 되길 기원했다. 국민들은 그가세상을 떠나자 애도의 물결이 넘쳤다. 국장을 치러야한다는 말도 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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