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위대한 애국주의자 장쉐량 장군의 “러브스토리”
中 위대한 애국주의자 장쉐량 장군의 “러브스토리”
  • 한인희
  • 승인 2009.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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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사변의 주인공 장쉐량 장군과 짜오쓰 아가씨의 사랑이야기<상>

장쉐량(張學良)은 1901년 6월 3일 랴오닝(遼寧)성 하이청(海城) 현에서 봉천군벌 장쮜린(張作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인들은 그를 ‘소년 사령관(少帥)’이라고 불렀다.
특히 그는 민국 시기 ‘4대 미남자’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그를 위대한 애국주의자 장군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공내전 시기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하고 중국을 침략하는데도 계속적으로 마오쩌둥의 공산군을 공격했다.
그러자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양후청(楊虎城)과 함께 ‘서안사변’을 주도해 장제스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키고 국공내전에 참가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군법상 ‘하극상’이었다. 이를 틈타 중국공산당은 전세를 회복할 수 있었고 결국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당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장제스에게 체포되고 타이완으로 철수한 뒤에도 남은 인생을 연금생활로 살아가야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장수해 백세를 살았던 노장군은 2001년 10월 14일 미국에서 서거했고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부인 자오이띠(趙一荻)여사와 하와이에 안장되어 있다.
쟈오이띠여사는 쟈오쓰(趙四) 아가씨라고도 부른다. 이유는 집안에서 넷째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이름은 쟈오치샤(趙綺霞)였다. 그녀의 원적은 저쟝(浙江)성 란시(蘭溪)로 명망높은 관료집안이었다. 부친은 북양정부의 교통부 차장(차관)이었던 쟈오징화(趙慶華)였다.
그는 6남 4녀를 두었다. 짜오쓰는 1912년 홍콩에서 출생했다. 홍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다음 그녀는 부친을 따라 텐진(天津)으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당시 천하의 풍류남아이자 민국시기 4대미남자였던 장쉐량과 그녀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텐진이었다. 그녀는 청소년 시기 텐진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15, 6세 정도였다. 공부를 잘하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거기에다 다른 학생과 싸우는 법이 없었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그녀는 취미가 많았다. 말타는 것을 좋아했으며, 테니스, 수영, 운전, 무용 등 당시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독서였다. 그녀의 미모에 대해서는 중등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키가 컸다. 텐진의 <북양화보(北洋畵報)>에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다. 
장쉐량과 그녀가 처음 만나게 된 시기는 1927년 5월 어느 저녁이었다. 장쉐량의 나이가 26세 정도로 젊었던 시기였다. 당시 정치의 중심지인 베이징의 북양정부의 고관대작들은 베이징에서의 사생활이 보장이 되지 않자 늘 텐진에 가서 술 마시고, 여자와 놀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텐진은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150키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당시 텐진은 상하이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도시였다. 이곳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열강들의 조계가 있었고 5곳의 외국교회당이 있었으며, 7곳의 서양인들의 클럽이 있었으며, 8곳의 테니스클럽과 한 곳의 경마장이 있었다. 이곳의 유명한 차이(蔡) 공관이 있었다. 이 공관의 주인은 차이샤오지(蔡少基)로 이후 장쉐량의 사돈으로 셋째 아들의 장인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북양대학 총장, 텐진해관의 책임자로 서양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주 파티를 열었고 장쉐량도 단골이었다.   
젊은 쟈오쓰도 늘 부적거리는 이러한 모습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장쉐량의 텐진의 별장은 옛 프랑스조계 32호로 54호였다. 3층의 양옥으로 건물이 아름다웠다.
이때 짜오스도 술집의 지앙쉬에(降雪)라는 마담의 소개로 장쉐량과 알게 되었다. 짜오쓰는 텐진의 고등학교 학교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사랑의 강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1928년 6월 3일 장쉐량의 아버지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일본 관동군이 폭발시켜 장쭤린은 사망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장쉐량은 급히 펑티엔(奉天:지금의 선양)으로 돌아왔다.  
쨔오쓰의 부친 쨔오징화는 딸이 장쉐량과 연예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딸이 나이차가 많은 유부남과 살에 빠졌다는 소식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손을 떨었다. 한 바탕 욕을 퍼붓고 사람을 시켜 주야로 지키도록 했다.
이러한 연금의 시기는 쨔오쓰에게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여섯 번째 오빠 쨔오옌성(趙燕生)의 도움으로 집안 식구들과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장쉐량이 있는 펑티엔으로 갔다.
딸이 도망간 사실을 안 아버지는 신문에 딸과 부녀관계를 끊는다는 광고를 내었다. 딸에게 실망한 아버지는 이때부터 관리를 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장쉐량의 집에서도 조금은 불안했는데 장쉐량의 본부인 위펑(于鳳)은 그녀에게 장쉐량의 비서 자리를 주었다. 본부인 위펑은 대범한 여자였다. 그녀는 쨔오스를 위해 장쉐량의 집안의 동쪽에 작은 별체를 그녀에게 안배하고 그녀가 일을 하도록 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이 건물을 자신이 설계하고 디자인해 침실을 만들기도 했다. 질투 없이 잘 지냈다. 1929년 장쉐량 장군과 쨔오쓰 사이에 유일한 아들이 태어났다.
1936년 12월 12일 역사적인 ‘서안사변’이 발생하고 부하가 상관에게 쿠테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제 장쉐량장군은 장제스부부와 함께 난징(南京)으로 압송되어 갈 때 두 가지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는 자신의 동북군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이철(王以哲)과 우학충(于學忠)에게 대신 관리를 부탁하는 서신을 썼고, 또 다른 하나는 짜오쓰 모자에 대한 걱정이었다. 참모장에게 본인이 서안을 떠난 뒤에 즉각 짜오쓰 모자를 홍콩으로 보내도록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 짜오쓰는 절대로 장쉐량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본부인 위펑이 홍콩으로 떠나자 비로소 홍콩으로 떠났다.
1940년 본부인 위펑이 병이 걸려 미국으로 치료를 하러가자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아들을 부탁하고는 본인은 장쉐량의 곁으로 가서 비서로서 부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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