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사랑한 ‘중화제일필’ “화장실 이란 글씨만 안썼네요”
중국인이 사랑한 ‘중화제일필’ “화장실 이란 글씨만 안썼네요”
  • 한인희
  • 승인 2009.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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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중국 최고의 서예가이자 문물 감정가였던 치공(啓功)<하>

둘째, 치공의 예술적 평가이다. 치공은 저명한 학자이자, 화가이며, 서예가였다. 특히 그는 중국 ‘언어문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심지어 어려운 팔고문(八股文) 분야도 뛰어났다. 그는 시사에 능했으며, 고서화 감정에 특별히 조예가 깊었다.
그의 서예작품을 보면 비첩에 매우 조예가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이른바 ‘비첩학’은 명청대에 특별히 발전했던 학문이지만 현대에 와서 이 분야를 개척한 인물이 바로 치공이었다. 그는 두 가지 길을 개척했다. 하나는 그 가운데 역사자료를 연구하고 비각의 문사를 고증했고, 또 하나는 비첩의 서예 예술을 감상하고 연구하는 일이었다. 치공선생은 양자를 모두 겸했던 인물이었다. 유명한 서예가 이를테면 쑨청저(孫承澤), 옹팡강(翁方綱)과 예창즈(葉昌熄) 같은 대가들도 이루지 못한 경지였다.
지금도 중국에 가면 치공선생 글씨가 너무도 많다. 광고판이든, 서명이든, 회사간판이든 없는 곳이 없다. 치공 선생은“화장실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았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치공선생 글씨가 중국에 많다는 말이다. 한번은  TV프로그램인‘동방의 아들(東方之子)’에 출연해 자신은 서예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은 교사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좀 더 봐준다면 화가이고, 서예는 여가생활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치공 스스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서예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
서예가로서 명망이 높아진 이후 그에게 글씨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치공은 귀천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글씨를 써주었다. 그가 글을 쓸 때는 좋은 벼루와 먹을 따지지 않고 화선지 아래 옛날 신문 몇 장 깔고 입에서 나오는 싯구에 따라 곧바로 글을 써내려갔다. 치공은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은 뒤에도 늘 넉넉한 마음과 유머가 넘치는 태도로 글을 써주었다. 그의 글씨체는 컴퓨터에도 수록되어 있다. 중국의 컴퓨터회사 중 ‘북대정방’이라는 베이징대학에서 운영하는 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에서는 치공선생의 글자체를 컴퓨터에 수록해 치공의 글자체인‘방정계체(方正啓體)’로 운영하고 있다.
셋째, 청말 중국화단의 대가 치바이스(齊白石)와의 인연이다. 치바이스는 치공을  ‘어린아이’로 불렀다. 치공은 15살부터 25세까지 10년 동안 운 좋게도 당시의 최고의 예술가, 시인, 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자시민(賈羲民), 우징딩(吳鏡汀), 다이장푸(戴姜福), 푸신(溥心),푸쉐치( 溥雪齋), 치바이스 등이었다. 치공은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정식 사제 관계를 맺었다. 그 가운데 치바이스 선생은 치공의 먼 친척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 친척은 관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치바이스 선생에게 최고급 관을 보내주고 장수를 기원했다. 이런 인연으로 치바이스 선생과 친해졌고 치바이스의 그림을 좋아했다. 친척은 치공에게 치바이스 선생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라고 종용했다. 치공은 치바이스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치바이스 선생의 예술적 경지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치공은 치바이스 선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대해서 눈을 떴다. 치바이스 선생은 특히 새우그림이 유명하다. 치공은 치바이스 선생이 새우를 그리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치바이스 선생께서 직접 그리는 것을 보기 전에는 어떻게 그렇게 생동적인 그림을 그리는지 알 지 못했다. 직접 보니 그분은 손을 써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움직여서 그리는 것이었다. 종이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손은 계속 한쪽 방향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욱 쉽게 손을 잡거나 힘과 느낌이 살아난다. 이것은 비밀이었고 바로 경험이었다.”라고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넷째, 부인이야기다. 치공의 부인 이름은 장바오천(章寶琛)이다. 그녀는 치공보다 두 살이 많았고 만주족이었다. 치공은 습관상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 부인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조금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검약해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치공이 늘 부인에게 고맙고 감동스러웠던 것은 1957년 모친과 고모가 병으로 연이어 쓰러지자 부인 혼자서 두 분을 보살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힘들었으나 한번도 불평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자료를 태우거나 숨기기 바빴다. 그러나  치공의 부인은 남편의 원고 모두를 안전하게 보관해 치공을 감동시켰다.
1971년,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황달성 간염으로 입원했었다. 1975년, 병이 재발해 베이징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치공은 낮에는 중화서국(中華書局)의 <24사>를 교점하면서도 밤에는 부인을 위해 좁은 병실에서 3개월을 함께 지내면서 간호했다. 병이 깊었던 부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남편이 재혼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치공은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집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재혼했다.”라고 고백했다.
다섯 째, 서화 감정에 관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평생 동안 가장 근면하고 열심히 했던 일을 서화 감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서화 감정 과정에서 나름대로 조심해야할 것을 밝혔다. 그는 고서화 감정이란 쉬운 일이 아니고 사회로부터 압력 때문에 불공정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따라서 고서화 감정가들이 경계해야할 7가지를 발표했다. ①국가의 권위에 밀리지 말 것(皇威), ②부유하고 존귀한 인물들에게 휘둘리지 말 것(挾貴), ③유명한 선배들에게 휘둘리지 말 것(挾長), ④단점을 감싸지 말 것(護短), ⑤선배들의 이름에 현혹되지 말 것(尊賢), ⑥타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것(遠害), ⑦여론에게 휘둘리지 말 것(容衆) 등을 강조했다. 그는 앞의 세 가지는 사회적 권위의 압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뒤의 네 가지는 감정자의 사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감정을 위해 애썼다.
그는 비록 학력은 높지 않았지만 만주학계와 서화계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의 글씨가 유명해 ‘중화제일필’이라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은 “제 글씨는 그림만 못하고 그림은 문물감정만큼 못하다”라고 겸손해했다.
그는 생활이 나아지고 자신의 서예 작품의 값이 오른 뒤에도 집안의 가구하나, 낡은 소파마저도 바꾸지 않았으며 평생 검소하게 생활했다. 치공 선생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집이 국보급의 유명인사의 집인지를 모를 정도였다. 그는“늘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친구나 학생들이 찾아오면 맛있는 차 한잔 대접할 정도면 되지요!”
치공은 은사 천위엔선생에 대한 존경이 특별했다. 그는‘대학에 들어가다(上大學)’라는 글에서 “은사 천위엔의‘은(恩)’자는 보통의‘은자(恩字)’가 아니예요. 나의 사상과 지식을 다듬게 한 은의(恩誼)의 은자(恩字)입니다!”라고 자신을 키워준 은사 천위엔에 대한 감사의 정을 표했다.
1988년 8월 치공은 자신의 서예와 회화 작품을 판매해 기금을 모아서 베이징 사대의 ‘려경장학조학기금(勵耕獎學助學基金)’을 설립했다. 이후 2년 동안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여 1990년 12월 홍콩에서 <계공서화의전>을 열었고 300여 작품 중 100폭의 서예작품과 10폭의 회화 작품을 전시하고 100여개 작품은 사회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써주었다. 당시 모금된 163만위엔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장학금 이름은 ‘려경(勵耕)’으로 했다. 그 이유를 묻자 “‘려경서옥’의 ‘려경’ 두자를 따왔어요. 그 목적은 천위엔 선생의 애국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천위엔 선생의 엄격한 학문을 하는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라고 은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치공은 시서화에서 큰 업적을 이룬 인물이었다. 일찍이 “중국서법예술종신성취상”을 받았고 일생동안 고전문학, 중국어, 고대문학, 사학, 경학, 언어문자학, 선학 등을 연구했고, <한어현상논총(漢語現象論叢)>, <시문성률논고(時文聲律論稿)>, <고대자체논고(古代字體論稿)> 등의 저서가 있고, 청대사에 조예가 깊어 7년에 걸친 <청사고(淸史稿)>를 교점했으며, 1950년대는 <홍루몽>에 주석을 붙였다.
평생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치공은 황족이었던 조상의 덕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성취가 더욱 값지다는 점을 깨닳게 해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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