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한 미소가 아름다운 ‘치공’ 그의 노력으로 얻은 성취가
천진난만한 미소가 아름다운 ‘치공’ 그의 노력으로 얻은 성취가
  • 한인희
  • 승인 200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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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쥐에루어’ 보다 빛났다

치공(啓功)선생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당대 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다. 그는 서예가로서 뿐만 아니라 저명한 교육가, 고전 문헌학자, 서화가, 문물감정가, 시인, 국학대사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두루 정통했던 인물이었다.
필자는 1991년 5월 14일,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 장칭(江靑)이 감옥에서 자살한 날, 홍콩에서 치공선생을 직접 뵐 수 있었다. 그날 치공선생은 홍콩의 유명 문화 인사들과 함께 저녁식사에 초대되었고 필자도 말석에 앉아 그분을 직접 뵙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그분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매우 푸근하고 중국의 상징‘팬더’를 닮은 노학자의 풍모였다. 치공선생은 시종일관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처럼 웃음이 가득했으며, 전통 베이징 발음이 강해 웅얼거리듯 하는 말로 문혁시기의 뒷이야기들로 풍성하면서도 의미 있는 저녁 만찬으로 기억하고 있다.
1912년 7월 26일에 태어나 2005년 6월 30일 9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치공의 자는 원백(元白)이고‘元伯’이라고도 했다. 만주족으로 팔기(八旗) 중, 정람기(正藍旗)였다.
성은 치(啓)이고 이름은 공(功)이다. 그는 청나라의 황족 아이신쥐에루어(愛新覺羅) 집안이었으나 본인은 황족이라는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치공은 청나라 옹정(雍正) 황제 제9대손이다. 옹정의 넷째 아들의 이름이 홍력(弘曆)이고 황위를 계승했으며 바로 건륭황제이다.
치공의 조상은 옹정 황제의 다섯째 아들로 홍주(弘晝)이고, 건륭황제 보다 한 시간 늦게 태어났다. 당연히 그들은 이복형제였다. 건륭이 황제로 즉위한 뒤 홍주는 화친왕(和親王)으로 봉해졌다. 치공은 화친왕 홍주로부터 9대 후손이었다.
치공은 어린 시절에 조부가 매우 귀여워했다.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베이징 옹화궁(雍和宮)의 라마승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도록 배려했다.
사실 치공은 이미 세상물정 모르던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10살의 어린 나이에 증조부와 조부가 각각 세상을 떠났다. 집안 어른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동안 진 빚 때문에 집안이 쇠락했고 아무리 황족이라도 이미 기운 가게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어려움 속에서 증조부의 제자들의 도움 하에 겨우 학교 공부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었다. 가난 때문에 베이징의 화이원(匯文) 중학을 중퇴했고 독학으로 공부했다. 1933년 21살이 된 치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이 시기 그림과 서예에 진력했으며 나날이 실력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는 독학하면서 당시 중국 최고의  지식인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런 기회는 그에게 행운이었다. 자시민(賈羲民)과 우징딩(吳鏡汀)에게서는 서예와 단청을 배웠고, 다이장푸(戴姜福)에게서 고전문학을 배웠다. 이렇게 해 치공은 각고면려 끝에 학업을 완성했다. 1933년 조부의 제자였던 푸쩡상(傅增湘) 선생의 추천으로 천위엔(陳垣)선생에게서 고증학을 배웠다. 천위엔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푸쩡상은 치공의 작품을 들고 당시 푸런(輔仁)대학의 총장이던 천위엔(陳垣) 선생을 찾아갔다. 천위엔은 치공의 생계를 위해 푸런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치공의 교사로서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치공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본인도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학교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정식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쫓겨난 치공은 백면서생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하는 일이라곤 종일토록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치공은 서예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1935년 치공은 재차 천위엔의 소개로 푸런대학 미술학과에서 강의를 하다가 재차 자격 문제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두 차례에 걸쳐서 사회의 냉혹함을 경험한 치공은 쉬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는 일이 성공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깨닳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실력을 쌓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욱 노력해야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두 번이나 자신을 푸런대학에 소개했던 은사 천위엔 선생이 다시 세 번째 푸런 대학에 소개해 대학 1학년들의 중국어를 가르치도록 소개해주었다. 마침내 세 번째 만에 대학의 정식 강단에 섰다. 치공은 푸런대학에서 학력이 없는 유일한 대학교수였다. 치공은 천위엔 선생을 회상하면서“당시에 사제지간의 정이였으나 은사님과 나는 부자관계나 마찬가지였다.”회고하면서 평생 고마워했다.
치공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술적으로 자신을 가다듬고 학문의 진리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후 수 십 년  동안 자신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엄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중국문학, 중국 미술과 당송의 시사, 역대산문 등의 과목을 강의했고 조교에서 강사로 부교수로 승진했으며, 건국이후 베이징사범대학 중문학과로 자리를 옮겨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쳤다.
치공은 1938년 고궁박물원의 전문위원이 되었고 고궁문헌관의 심시위원 및 감정위원으로 일했으며, 1949년 푸런대학의 중문학과 부교수 겸 북경대학 박물관학과의 부교수에 임명되었다. 1952년 베이징사범대학의 부교수가 된 이후로 평생 이 학교의 교수로 봉직했다. 이후 중국인민정치협성회의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국가문물감정위원회 주인위원, 중앙문사연구관 관장을 역임했고 중국서예가협회 명예주석, 중국불교협회, 고궁박물원, 국가박물원의 고문을 역임했다. 그는 생전에 명말청초의 저명한 불교학자이며 시인이자, 서예가였던 파산선사(破山禪師)를 존경했다.
치공과 관련한 몇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그는 청조의 황족인 아이신쥐에루어(愛新覺羅) 집안이라는 점을 부인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나의 성씨를 ‘아이신쥐에루어 치공’으로 부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아이신쥐에루어들이 자신의 성을 자랑하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아이신쥐에루어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불러주는 일은 자신들을 존경하는 의미로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실제로 별의미가 없다. 과연 아이신쥐에루어가 하나의 성씨로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욕이 될 수도 있고, 영광이 될 수도 있으며 완전히 정치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감정적으로 나는 아이신쥐에루어는 성씨를 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그는 진정으로 정당한 사람은 자신의 집안을 팔아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 서예가의 최고봉으로 ‘서성(書聖)’이었던 왕시지(王羲之)도 위진남북조 시기 최고명문 거족이었던 ‘낭야 왕씨’라는 것을 밝힌 적이 없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그의 고백을 계속 들어보면 “어떤 이는 나에게 ‘아이신쥐에루어 치공’귀하라는 편지를 보내오는 적도 있다. 처음에는 웃어넘겼으나 나중에는 그런 편지가 많아지자 ‘이런 사람이 없어서 돌려보냅니다’라고 회신하기도 했다.” 그가 왜 황족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았는지를 이해하는 주요한 실마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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