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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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일보
  • 승인 2020.08.1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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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3. 남북전쟁과 노예해방

링컨은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 가지로 경제 분야에서도 독학(self-taught)을 통해 경제의 식견을 넓혔다. 

그는 당시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운하와 철도, 교량, 고속도로 그리고 항해할 수 있는 강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투자로는 부족하다는 신념을 지지하는 위그당(공화당)애 가입했다. 

남북전쟁의 핵심은 합중국을 구하는 것(save the Union)과 흑인 노예문제였다. 미국역사 하면 흑인문제를 빼 놓을수 없다. 미국은 1607년 영국의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세워진 나라다. 비슷한 시기인 1619년부터 영국 이주민들은 아프리카로 부터 흑인 노예를 수입(당시는 물건 취급)해 농사일을 시켰다. 당시 주요 재산 목록은 토지와 노예가 전부였다.

링컨은 1858년 7월12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로 지명 되었을 때 수락연설(house-divided speech)에서 노예문제에 대해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링컨은 이 연설에서 미국이란 나라를 한 집안에 비유해 “미국이 노예주와 자유주로 나뉘어 계속 반목하면 미국이란 나라는 지탱될 수 없다(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t stand, 마태 12:25)”고 했다.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고배를 마셨으나 이 연설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되었다. 1860년 2월14일에는 서부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Chicao Tribune)의 지지를 받았고 11월6일에는 대선에서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1861년 2월11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를 떠나 23일(토), 워싱턴에 도착해, 대통령에 취임할 때 까지 잠시 윌라드 호텔(Willard Hotel)에 머물렀다. 

1860년 미국 인구는 3천140만(1790년 192만)이고 최대 도시인 뉴욕은 81만에 달했다. 특히 남부는 농업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흑인 노예문제는 멕시코 전쟁(1846-48)에 의한 영토의 팽창으로 중대한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멕시코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6개주(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아리조나, 콜로라도)를 합쳤다. 

멕시코 전쟁에 의한 영토의 팽창은 노예제도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정치적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1849년 까지 30개주 가운데 15개주는 노예주(slave state), 15개주는 자유주로 균형을 유지해 왔으나 테일러 대통령이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천거하자 남부의 노예주들은 연방분리(disunion)위협으로 대립했다. 남부에서 노예는 면화 재배와 설탕 재배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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