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현대일보
  • 승인 2020.08.0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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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링컨은 성경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성경의 단어나 구절 들을 메모용지에 적어 두었다가, 중대한 발표나 연설을 할 때 인용 보도해 대중을 감동시켰다. 링컨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사람(religious man)이었으나 정규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churchgoer)은 아니었다. 링컨은 1850년 4살 된 아들인 에드워드가  사망했을 때 장로교회를 잠시 다니기는 했으나 어떤 교회에도 적을 두고 규칙적으로 다닌 적은 없다.  

링컨은 폭넓은 독서를 통해 아주 멀리 풍요로운 뉴욕 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가난의 사슬(prison of poverty)에 벗어나는 길도 터득하게 되었다. 인디애나에서 링컨은 나룻배로 몇 명의 손님을 오하이오 강에 있는 당시 유행하는 증기선(steam boat)까지 태워다 주고  난생 처음 당시 거금에 속하는 50센트를 벌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스릴을 체험했다. 링컨은 정치에 입문 하기 전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사, 변호사, 우체국장 등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링컨은 1832년 처음으로 정치에 입문 했다. 가게 점원인 링컨은 23세 때 일리노이 주 생가몬 카운티 주의회 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나 링컨은 1838년 29세 때 명망있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라이시엄에서 연설했다. 변호사 생활 2년에 주의회 의원 4년 경력의 링컨은 이 연설에서 노예제도의 문제점을 아주 예리하게 지적했다(1838 Lyceum Address).  링컨은 1842년 33세 때 부유한 집안의 딸인 메리 타드(Mary Todd)와 결혼을 했다. 메리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링컨 보다 10년 가까이 젊었다. 당시 미국 여성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랄 정도로 가정이 부유했다. 그녀는 20대 초에 몸이 통통하고 누가 보아도 잘 생긴 얼굴(good-looking)은 못 되었다. 그럼에도 링컨은 메리에 반했다. 이는 아마도 링컨이 9살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모성애가 강하고, 보호 본능이 있는 여성에 매료되었을 것이라고 사가들은 말 한다. 메리는 이런 점에서 아주 적격이었다. 

링컨은 슬하에 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두 명은 어려서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1850년 4살 때 결핵으로 죽었고, 윌리는 1862년 11살 때 장티푸스(typhoid)로 죽었다. 윌리는 아주 씩씩한 아이로 링컨이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아버지와 씨름도 하고 백악관 잔디 밭에서 조랑말(pony)을 타면서 놀기도 했다. 그의 세 번째 아들인 태드는 링컨이 사망한 후인 1871년 18살 때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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