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 한인희
  • 승인 2009.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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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 4대에 걸친 최고 부자, 롱씨집안 이야기<하>

롱씨 집안의 원칙은 “돈은 관리를 잘해야 하고, 남에게는 은혜 베풀어야한다”
부자가 되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롱종징은 상하이에서 분투를 하고 있을 때 롱더성은 고향 우시에서 지방의 복지 사업에 정력을 투입했다.
부자가 된 롱씨 형제도 닮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있었다. 같은 장수성 난통(南通)출신의 지앙치엔(張騫)이었다. 그는 과거 시험에서 장원에 합격을 했고 중국의 부강을 위해 ‘교육으로 실업을 개진하자’라는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롱씨 형제도 지방의 도로를 보수하는 이외에도 열정적으로 교육 사업에 투입했다.
1906년 먼저 고향의 가숙을 기초로 해 공익학교를 설립했고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공상중고등학교, 공공도서관과 대학을 속속 설립했다. 롱더성은 자신이 세운 지앙난대학(江南大學)의 총장을 맡기도 했다.
사업을 하다보면 어려움이 닥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형제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1934년 3월에 있었다. 당시 은행에서 빌린 채무를 갑작스럽게 회수하는 사태가 나타났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무엇보다 먼저 롱씨 형제가 사업을 지나치게 크게 확장해 빚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시 국제적으로 은가가 폭등함으로써 미국이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자 국제 금융의 위기가 나타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위기는 계속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8월에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하이 지역의 2,270개의 공장이 파괴됐고, 롱씨 집안의 상하이 공장도 2/3가 잿더미가 됐다.
더욱이 롱씨 집안 내부의 분열이 나타났다. 1946년 4월 25일에는 롱더성과 아들, 사위가 국민당군 제3방면군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롱씨 집안은 50만 달러를 주고 풀려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당 정권과의 신뢰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항전기간 저우언라이를 대표로하는 중국공산당 남방국은 공개적으로 재계 인사들과 접촉을 했고, 마오쩌둥도 재계 인사들을 초대해 회유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롱씨 집안은 이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게 됐다. 중국인들은 롱더성의 아들 롱이런(榮毅仁)을 ‘붉은 자본가’라고 불렀다.
1949년 33살이었던 롱이런은 롱씨 집안의 사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상하이 공상업계는 공산주의자이였던 천이(陳毅)시장과 관계가 원만했다.
이들은 과거 부패한 국민당관리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중국공산당은 대륙에 남기로 한 롱더성과 롱이런 부자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특히 젊은 롱이런에게 기대를 크게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공상업계의 모델로 만들고자 했다. 1951년 3월 중국에서는 과격한 정치운동인 ‘3반 5반 운동’이 휩쓸었다.
 이 운동은 자본가에 대해 대대적인 타격을 주기 위한 정치운동이었다. 이 운동으로 1952년 1월 25일부터 4월 1일까지  자살한 기업가가 876명에 달했다. 롱이런에 대한 타격도 가혹했다. 그의 재산은 당시  2,096억 위안이었고 불법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특별조치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롱이런은 정치가의 길로 나선다. 1957년 전인대 대표가 됐고, 이후 상하이 부시장이 됐으며, 1959년에는 방직부의 부부장이 되기에 이른다. 그는 점차 사회주의 중국에서 특별한 코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자본가에 비해 행운아였다.
여러 차례의 가혹한 계급투쟁 운동에서도 일부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동란의 시기 문혁 때도 건재했다.
특히 저우언라이가 방직부의 당 조직에게 “롱이런은 중국 민족자본계급의 대표적인 인물이요. 국내외에 모두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당신들이 잘 생각해서 보호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해준 때문이었다.
엄혹한 문혁시기를 버티어 낸 롱이런은 1979년 1월 인민대회당에서 덩샤오핑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8년 12월 28일, 11기 3중 전회에서 개혁개방정책 실시를 천명한 덩샤오핑은 공상업계 원로 5명과 좌담회를 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롱이런은 덩샤오핑에게 외자를 도입해 중국경제를 발전시켜야한다는 건의를 했다. 이에 흥미를 느낀 덩샤오핑은 그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롱이런은 <국제투자신탁공사 건립을 위한 몇 가지 초보적 의견 건의>보고서에서 “외국으로부터 자금을 흡수해 선진기술을 들여와 4개현대화를 실현해야한다”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마침내 1979년 7월에 국무원이 정식으로 중신국제신탁투자공사(中信國際信託投資公司:CITIC) 설립을 비준했고, 이 회사는 롱이런이 책임자이고 원로 자본가들과 정치권의 고위간부의 자식들로 구성이 된 특별한 회사였다.
이 기업은 국무원의 직할 기업이자 정치적 배경을 가진 기업이었다. 롱이런의 생의 마지막 14년은 거대 기업 ‘중신’을 일구었고, 거액의 외자를 도입해 중국 개혁개방 정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롱이런이 ‘중신’이었고 ‘중신’은 롱이런의 마지막 생애를 빛나게 했다.
이를 통해 중국의 개혁개방의 결심이 외부로 전해졌고, 1987년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서는 “중신회사의 시험적인 탄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관계없이 이 회사는 절대로 파산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어느 분석가의 말을 빌리면 만약 이 회사가 파산을 하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도 실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롱이런의 가족은 미국, 캐나다, 호주, 브라질, 독일, 홍콩 등지 살면서 조상들이 걸었던  실업계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영향력도 컸다. 1986년 덩샤오핑의 제안으로 롱이런의 70세 생일과 금혼식을 기념해 당중앙통전부의 초청으로 롱씨 집안 모임이 있었고 200여명이 인민대회당에서 모임을 갖고 덩샤오핑, 천윈 등 국가 지도자들을 접견하기도했다. 한 집안 가족이 이렇게 초청된 것은 중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이후 속속 중국에 투자했다.
롱이런은 1983년 6월 전인대 부위원장이었고, 1993년 3월부터 1998년 3월까지 국가부주석의 역임했다. 이 붉은 자본가는 1985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었다. 2005년 10월 26일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낫다.
자본가에서 사회주의자로, 다시 자본가로 살아온 롱이런의 인생은 중국 현대사의 ‘압축판’이었다.
그의 아들 롱즈젠(榮智健)은 1942년에 태어났다. 롱씨 집안의 유일한 남자 계승자였다. 어머니 량지엔칭(楊鑒淸)은 외아들을 편애했다. 소년 시절부터 그는 상하이의 유명한 부자집 아들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스포츠카를 생일선물로 받을 정도였다. 텐진대학(天津大學) 재학 중에는 야구에 미치기도 했다.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문혁시기 백두산 밑의 수력발전소로 하방되어 영하 30도에서 노동을 하기도 했다. 30년 동안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보지 못했던 롱즈젠은 개혁개방시기 홍콩에서 그의 사촌들과 전자제품 생산 공장을 6년 만에 자산을 400배로 키우기도 했다.
1986년 44세가 되자 ‘중신홍콩’의 총경리의 신분으로 홍콩에 등장했다. 이후 1990년 ‘중신타이푸(中信泰富)의 회장이 됐다. 이후 대대적으로 투자를 증액해 國泰航空의 12.5%, 홍콩전신 20%, 항룡항공 38.3%, 동구해저수도 23.5%, 오문전신 20%의 주식을 소유해 총자산이 200억 홍콩달러에 달했다.
2005년 <포브스>의 평가로 중국의 최고 부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치의 대왕의 반열에도 올랐고, 금년 초 외환 투자 실패로 155억 홍콩달러의 손실을 입히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롱씨 집안의 몰락이었다. 이 소식으로 중신타이푸의 주가가 하루 만에 55.1%가 떨어지고 시가 총액이 154억위안(한화 9,000억)이 허공으로 증발하기에 이른다. 롱씨 집안의 행적을 보면서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교훈을 다시 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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