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현대일보
  • 승인 2020.02.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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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철학의 삼총사(4)

김형석은 두 친구를 보내고 난 후에는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 같지가 않았고 한층 더 고독해 졌다고 했다. 그러나 말년에 이들 “셋의 우정”은 사회적 공감을 얻으면서 이들 두 친구는 세상을 떠났으나 정신적으로 오래 남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다. 

4. 쌍둥이 이력

김형석과 안병욱은 너무나 닮은 점이 많아 쌍둥이 이력이란 말이 있다. 1970년 경, 경부선 열차가 천안역에 정차 했을 떼 김형석의 왼쪽에 앉아있던 승객이 내리고 그 자리가 비었다. 복도 저 쪽에 앉아있던 한 젊은 여성이 그 빈자리로 옮겨 앉으면서 옆에 앉아도 괜찮으냐고 인사를 했다.  

그 여성은 “저는 교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쓰신 책도 읽었고 방송도 듣고”라고 하면서 어색함이 없이 말을 꺼냈다. 여자 승객은 “교수님 고향은 북한이고, 어린 시절은 시골서 보내다가 평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 셨지요“라고 했다. 김형석은 ”모르는 것이 없네요 라고 하면서 웃었더니, 그 다음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 하셨고요. 해방 후에는 월남 하셔서 잠시 고등학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대학의 교수가 되셨지요“ 라고 했다. 

“책도 여러 권 쓰시고 방송과 강연도 많이 하셨지요. 프랑스의 파스칼에 관한 책도 읽은 것 같은데요” 라고 하면서 김 교수의 과거를 상세히 아는 것 같았다. 김 교수가 나에 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기분이 좋은데요 라고 하면서 웃었더니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옆에서 뵈니까 생각 했던 것 보다 미남이십니다”라면서 김 교수의 얼굴을 처다 보았다.

그러더니 아참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성함은 안병욱 선생 님 이시지요 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 교수는 멋쩍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혹시 안병욱 교수와 친구인 김형석교수도 잘 아세요라고 물었다. 아가씨는 그럼요, 두 분이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어요. 내 친구들도 다 잘 알고 있던데요. 그래도 “저는 교수님이 좀 더 좋았던 것 같애요”라는 것이었다. 할수 없이 서울역에 도착할 때 까지, 김형석은 안병욱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안병욱과 김형석은 공통점이 너무 많다. 이 두 교수의 이력과 경력을 고유명사만 빼고 이야기 하면 누구나 동일한 사람으로 볼 정도다. 그래서 쌍둥이 이력이란 말이 생겼다. 생년은 같은 해 이면서 김형석이 3개월 먼저 태어났다. 태어난 곳도 이들에게 영향을 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향에서 태어났다. 

같은 시기에 평양에서 자랐고 일본에서도 같은 때에 4,5년 간 같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두 사람은 같은 때에 탈북한 실향민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같은 대학에서 교수직을 맏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들 둘은 노력을 해도 안될 정도로 비슷한 일을 많이 했다. 1961년과 1962년에는 같이 미국에 머물다가 함께 유럽과 동남아를 여행을 하기도 했다. 같이 강연을 다니는 일도 수없이 많았다. 

5. 철학의 집

김형석과 안병욱은 같은 때에 탈북 한 실향민이다. 강원도 양구에 가면 “김형석 안병욱 철학의 집”이 있다. 강원도 양구의 뜻있는 인사들이 김형석과 안병욱이 90 고개를 넘어 섰을 때 이들을 위해 제2의 고향을 만들어 주었다. 양구는 휴전선 바로 밑이니까 북한과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양구는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이기도 했다. 양구의 전쟁기념관에는 야외에 9개의 기둥이 있다. 이들 기둥은 “펀치볼” 전투를 포함해 9개 지역에서 6개월 간(1951년 6-12월) 치열했던 전투양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군 전사자는 2,797명, 적군 전사자는 23,422명에 달했다. 

안병욱은 생전에 한번은 양구에 가보고 싶어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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