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기본적인것으로 中최고의 부를 축적하다
가장 기본적인것으로 中최고의 부를 축적하다
  • 한인희
  • 승인 2009.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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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현대 4대에 걸친 최고 부자, 롱씨(榮氏) 집안 이야기<상>

전통 봉건사회에서부터 혼란의 국공내전의 시기를 거치고, 사회주의 중국시기, 개혁개방의 시기 100여 년에 걸친 중국 최고 부자였던 강남지역 우시(無錫)의 롱씨 집안 이야기는 그것 자체가 중국의 근현대사이기도 하다.
시대적으로는 청조 말기에 부의 기초를 닦고 민국 초기에 민족기업이 발전하는 기회를 포착해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먹는 것과 입는 것’ 사업을 투자해 혼란의 국공내전 시기를 이겨냈다. 국공내전을 겪으면서 중국공산당과 협력하면서 ‘붉은 자본가’로 살아남았고 개혁개방의 시기에 새롭게 부를 축적해 <포브스>가 중국 최고의 부자로 인정한 롱씨 집안의 4대에 걸친 이야기는 ‘삶은 무리하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중국의 최고의 자본가였고, 구사회 시기 중국 절반의 재산이 그들 집안 것이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롱씨 집안은 태어나면서부터 귀족이었거나 명문거족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출신으로 공상업을 하면서 집안으로 인한 특권도 없었다. 이들 기업이 탄생하면서부터 사회의 주류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온갖 노력을 거치고 뛰어난 상업적 혜안으로 마침내 중국에서 최고의 기업가 집안이 되었다.
롱씨 집안은 공자의 72문도 중의 한 사람인 롱즈치(榮子祺)의 후손이다. 명나라 정통(正統) 초년 롱칭요우(榮淸由)가 진릉(金陵:지금의 南京)에서 우시(無錫)로 이주 한 뒤 강남에 자리 잡게 되었다.
가훈은 “농사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자신을 들러내지 말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는다.”였다. 이후 3, 4백년 동안 롱씨 후손은 한 사람도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농사짓고, 배를 운행하거나,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이후 롱이런이 국가부주석에 올랐으나 국가를 위해 공헌할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일찍이 명나라 때부터 부유한 강남지역에는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중국에서는 수 백 년간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 이유는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유일의 2천년이 넘도록 지탱해온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이었고  특히 정치권력이 경제를 장악해 왔던 문화적 타성과 관련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저명한 미국인 중국연구가 페어뱅크는 <캠브리지중국사>에서 “중국의 장편 역사극 속에서 상인계층은 겨우 조연에 불과했다. 대사는 겨우 몇 마디에 자나지 않았다. 그들은 제왕장상들의 명령을 받고서 집안과 우두머리들의 선전을 하는데 동원되었을 뿐이다”라고 지적한 점은 압권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상황에도 일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관료들이  주도했던 공업화운동이 좌절되고 마침내 민간의 상업역량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른바 ‘스스로 강해지고 부를 추구하는(自强求富)’ 구호를 내건 자발적인 실천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우시의 롱씨 집안은 시대적인 안목을 갖고 노력한 걸출한 집안이었다.
롱씨 집안이 중국 상업사에 등장하게 된 의미는 현대 자본주의 정신인 ‘근면과 절약’의 가치가 중국에서도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영화를 위한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들 집안의 청교도적인 창업정신은 중국 민족이 새롭게 일어서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중국은 백 여 년간 질곡의 역사였다. 이 기간 권력을 장악한 것은 부패한 정치권력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지식분자들과 봉건관료들 간의 교체만이 일어났을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장 이성적이고 온건한 공상계층은 시종일관 역사를 결정하는 권력의 구조의 밖에 배척당했고 난세 중에는 요절과 소멸해버리고 운좋은 얼마 되지 않은 자들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롱씨 집안 100년의 역사는 바로 100년의 중국의 정치경제 진실을 농축한 사진이며 바로 중국 상업가족 성장과 좌절에 관한 전기서이다.(<人物週刊>  徐琳玲기자의 평가)
이제 룽씨 집안의 역사를 살펴보자. 19세기 중엽, 룽이런의 증조부 롱시주(榮錫疇)때 가세가 기울자 롱이런의 조부 롱시타이(榮熙泰)가 어려서부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을 했었다.
1886년 롱시타이는 14살짜리 큰 아들을 롱종징(榮宗敬)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서 선박의 닻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배우도록 했다.
둘째 아들 롱더성(榮德生)도 형의 도움으로 상하이의 전당포에서 처음으로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 롱씨 집안의 부를 축적하는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이후 롱시타이는 사방으로 수소문해 남쪽으로 내려가 광둥에서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고향 우시 출신의 광둥의 지부(知府:지금의 시장)였던 관료 주쭝푸(朱仲甫)였다.
장사꾼이 되려고 결심했던 롱씨 형제의 나이는 20살 정도였다. 형과 동생은 4살 차이였다. 그들은 자본도 없고 사회적인 신용도 없었다. 더욱이 관계(官界)에 아무런 인맥도 없었다.
1900년 광둥 지부 주쭝푸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롱씨 부자는 그와 상의해 밀가루 공장을 설립할 것을 합의하고 회사 이름을 바오싱(保興)이라고 붙였다. 주쭝푸가 1만 5천위엔을 롱종징과 롱더성이 저축해 두었던 각각 3000위엔, 그밖에 모은 돈 9000위엔으로 제분회사를 시작했다. 주쭝푸가 관료였기 때문에 설립에 필요한 모든 행정적인 일을 책임지고 롱씨 형제가 준비와 경영을 맡았다. 주쭝푸의 정치적 배경으로 이렇게 설립한 제분공장은 10년간의 전매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후 제분공장의 대주주였던 주쭝푸의 생각은 이 공장이 고생만 하고 이익이 별도 남지 않는다고 판단해 주식을 회수하고 광둥으로 돌아가 관직을 계속하고 말았다. 갑작스런 변화에 롱씨 형제들은 바오싱제분공장의 이름을 마오신(茂新)제분공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장의 설비를 개선함으로써 생산품의 질을 제고시키고 선진된 영미제분기를 사들였다.
롱씨 형제는 사업은 “먹고 입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해 새롭게 쩐신(振新)방직공장을 설립했다. 롱씨 집안사람들은 1912년부터 1921년 10월까지 상하이와 우시지방에 14개 공장을 개설했다.
거의 20년간 롱씨형제는 롱씨 자본을 중심으로 마오신(茂新), 푸신(福新), 썬신(申新) 세 가지 계통의 공장을 운영했다. 이 공장들은 상하이, 우시, 한커우(漢口), 지난(濟南)에 있었고 중국 최대의 민영 실업그룹이었다. 1932년까지 썬신(申新)제사창의 생산력은 중국 전역 민간자본의 1/5이었고, 마오신(茂新)과 푸신(福新)의 생산규모는 전국의 밀가루 시장의 1/3이었다. 1933년 롱종징의 60세 환갑잔치에서는 그는   “지금 중국인 절반이 입고, 먹는 것은 모두 내가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다음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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