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의 진정한 가치, 그가 아니고서 누가 논하랴
골동품의 진정한 가치, 그가 아니고서 누가 논하랴
  • 한인희
  • 승인 2009.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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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골동품 수장가이자 ‘민국시기 4대 공자’ 장보쥐<상>

장보쥐(張伯駒)는 1898년 3월 14일 허난(河南)성 샹청(項城)의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근대 중국 최고의 문화명인으로 골동품수장 감상가, 서화가, 시인, 경극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일찍이 중국고궁박물관의 전문위원이었고, 국가문물감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옌칭대학 국문학과의 중국예술사 명예지도교수였고, 베이징중국화연구회 명예회장과 중국서법가협회 명예이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의 친아버지는 장씨 집안의 여섯째인 장진팡(張錦芳)이었지만 큰아버지 장전팡(張鎭芳)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자 장보쥐를 양자로 삼았다.
양아버지 장진팡은 위안스카이와 외사촌 간이었다. 양아버지 장전팡은 능력이 매우 출중한 인물이었다. 당시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합격했고 관료가 되어 고향을 떠나 텐진에서 근무하게 됐다. 그는 텐진에서 장로염운사(長盧鹽運使)가 됐다.
1905년 7살이 된 장보쥐는 이런 이유로 양아버지 집이 있던 텐진에서 생활하게 됐으며, 이후 텐진,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 살게 됐다.
장보쥐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신중하며, 총명했다. 중국은 청말에 이르러 과거제가 폐지되어 신식학당들이 속속 설립되고 있었다.
부유했던 장전팡도 신식학교 설립에 기부를 많이 했다. 그러나 자기 자식에게 만큼은 구식의 사숙에서 저명한 선생님을 초빙해 공부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해 장보쥐는 7살에 사숙에 들어가 공부했고, <증광현문(增廣賢文)>을 유창하게 외우자 선생님이 놀랐다. 그는 <삼자경>부터 <천자문> 등을 시작으로 <주자치가격언(朱子治家格言)> 등을 줄줄 외웠다.
그의 스승들은 “이 아이가 정말 똑똑해요. 장래에 반드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칭찬했다. 9살이 되자 장보쥐는 이미 시를 지을 수 있을 정도가 됐고, <고문관지(古文觀止)>를 거꾸로 외우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미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부친 장전팡은 양아들의 총명함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 기의가 폭발해 봉건제가 무너지고 공화제인 중화민국이 성립됐다. 이후 정치적 역정에서 84일간 황제를 역임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가족들은 대부분 허난 샹청에 남아있었다.
위안스카이는 이들을 모두 텐진으로 불러올렸다. 그리고 5명의 아들을 모두 영국인이 설립한 서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이 학교는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을 모델로 설립한 신식학교였다.
위안스카이는 이 학교에 거액의 찬조금을 지원했다. 이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게 된 장보쥐는 위안스카이 아들들과 가까운 친구가 됐다.
16살이 된 장보쥐는 서원을 졸업한 뒤 아버지의 권고로 위안스카이가 설립한 육군혼성모범단에 투신했다. 위안스카이가 친히 단장을 맡았다.
위안스카이는 개인적으로 인재를 배양해 자신의 친위 군대를 키워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설립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북양군대(北洋軍隊)와 보정육군군관학교(保定陸軍軍官學校) 제1회 졸업생 가운데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해 설립했다.
이들은 충성심이 강하고, 체력이 튼튼하거나, 장교직을 경험했거나, 전쟁을 치룬 경험자들인 엘리트 군인을 중심으로 선발했다. 나이가 어린 장보쥐는 선발조건에 미달했으나 아버지 장전팡의 배려로 파격적으로 기병과에 입학했다.
아버지 장전팡의 계산은 장보쥐가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군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보쥐는 군벌인 짜오쿤(曹昆), 우페이푸(吳佩浮), 장줘린(張作霖) 부대에서 제조참의(提調參議) 등 명예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이 군대와는 체질이 맞지 않았던 장보쥐는 군대를 나왔다. 아버지는 그를 질책했다.
그는 부모의 질책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하루 종일 말도하지 않고 오로지 집에 처박혀 독서를 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경전에 몰두했다. 3000권이 넘는 <24사>를 두 차례나 독파했고, 354권에 달하는 <자치통감>을 독파했으며, 당시(唐詩) 송사(宋詞)가 입에서 저절로 흘러 나왔다. 그가 가장 흥미 있게 읽었던 고전은 <노자>와 <장자> 등이었다. 그는 노장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회상하고 부친의 몰락과 청조의 와해, 위안스카이 왕조의 붕괴 등을 직접 목격하면서 삶에 대한 초연함을 익혔다.
그의 이러한 생활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정상이 아니고 ‘괴이’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한 친구가 그에게 ‘장귀신(張大怪)’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별명을 지어준 친구는 쑨야오둥(孫曜東) 형제였다. 그들은 집안끼리 오랜 기간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들의 눈에는 장보쥐의 언행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정계의 입문한 고위 집안이었으나 정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이후 은행업에 투신해 염업은행(鹽業銀行)의 이사, 총감사, 주인이었으나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은행일은 총경리가 일체를 맡아서 처리했다.
당시 그에 대해서는 “담배도 피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도박도 안하고, 실크제품도 입지 않고 양복도 입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으며 일년 내내 장삼만을 입고 음식은 매우 간단하게 먹는데 파를 썰어 넣은 달걀 볶음이 가장 좋했다. 차도 바퀴 네 개만 있으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장보쥐는 중국 근대의 최고의 골동 수장가였다. 대체로 1926년 즈음으로 우연한 기회에 그는 수장에 취미를 갖게 됐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정력과 재력을 모두 투입해 ‘천하 제일의 수장가’가 됐다. 그의 호는 ‘총벽(叢碧)’이다. 그 연유는 어느 날 베이징의 유명한 골동품 상가 류리창(琉璃廠)을 우연히 지나가다 강희(康熙) 황제의 어필인 ‘총벽산방(叢碧山房)’의 편액을 발견했다.
애석하게도 편액의 받침대가 망가져 ‘총벽산방’의 ‘방’자 떨어져 나갔고 그나마 ‘강희어필(康熙御筆)’이라는 주문인(朱文印)은 남아있었다. 장보쥐는 너무 기뻐서 즉각 그 편액을 고액을 지불하고 샀고 이때로부터 ‘총벽’을 자신의 호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대 글씨와 그림을 수장하기 시작했다.
골동품을 수장한다는 것은 첫 번째는 재산이 많아야 하고, 둘째는 골동의 가치를 분별하는 재능이 있어야만 한다. 장보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그가 공동품의 수장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수장의 전제조건인 ‘재산’을 말해보자. 장보쥐 집안은 당시 최대 상업은행의 대주주였고, ‘재능’을 말할 필요도 없이 어릴 때부터 오랜 기간 중국의 전통문화에 침윤했으며 소양도 깊었다.
수장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장보쥐는 모든 정력을 이곳에 쏟아 부었고 점차 골동품 감정과 감상의 대가가 됐다.(大河網, ‘民國四公子’之張伯駒:變賣家産造文物遺失/2009/04/0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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