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사랑한 천재, 누가 그를 괴짜라고 하는가?
중국을 사랑한 천재, 누가 그를 괴짜라고 하는가?
  • 한인희
  • 승인 2009.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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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학문에 능통했던 괴짜 유학자, 꾸홍밍 <하>

서양학문의 세례를 받은 꾸홍밍은 한편으로 동방문화의 지킴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꾸홍밍전>의 기록에 따르면 집을 떠난 지 14년 만에 고향 말레이반도의 패낭으로 돌아온 뒤 1885년 중국에 와서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장즈퉁(張之洞)의 막료가 됐다.
그의 직책은 통역관이었다. 한번은 장즈퉁의 생일 축하모임에 당시 중국 최고의 유학자였던 선쩡쯔 [沈曾植, 1850∼1922, 절강성 가흥(嘉興)사람으로 그의 학문지식은 동서고금을 꿰뚫었으며, ‘석유통유(碩學通儒)’ ‘중국대유(中國大儒)’라는 불릴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1880년 진사에 합격하고 총리아문의 장경(章京)직을 수행했으며, 1901년에는 상해남양공학(상해교통대학 전신)의 감독(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를 만나게 됐다. 당시 27살이었던 꾸홍밍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와 대담하게 서양학문을 논했다.
선쩡쯔는 학문 세계의 애송이 꾸홍밍에게 따끔하게 질책을 가한다. “자네가 하는 말, 내가 다 알아 듣겠네. (그런데) 자네가 내 말을 알아들으려면 아직도 20년간 중국전적을 읽어야할 걸세!”
이후 20년이 지나 장쯔퉁의 생일날이 됐다. 꾸홍밍은 장쯔퉁의 집에서 선쩡쯔를 다시 만나게 됐다. 꾸홍밍은 사람을 시켜 장쯔퉁의 서재의 장서들을 거실로 옮기도록 했다. 이 광경을 본 겨놓았다. 선쩡쯔는 꾸홍밍에게 왜 책을 옮기느냐고 물었다. 꾸홍밍은 “선배님께 한수 가르침을 받기 위함입니다.  선배님께서 외우실수 책을 제가 외우지 못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또한 선배님이 이해하시는 것을 제가 이해채하지 못하는 책은 어느 책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쩡쯔는 꾸홍밍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서  “자네가 외우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겠구만....”이라고 하면서 승부를 피했다. 그렇다면 꾸홍밍이 장쯔퉁의 막부에서 어떻게 20년을 보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꾸홍밍은 20년 동안 한편으로 번거로운 업무들을 처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쯔퉁의 가르침 속에 한학의 가장 기본서적인 <삼자경>부터 외우기 시작해 천가시(千家詩), 사서오경까지 공부했으며 자칭 ‘한학의 애송이’에서 <주역>을 연구하는 ‘한학의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외우는 방법으로 채득한 꾸홍밍의 학문은 이후 베이징대학에서 교수로 지낼 때 강의안이나 교재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영어로 강의하다가,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희랍어를 말하고 중국 경전의 인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고, 동서고금의 내용과 막힘이 없는 도도함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의 내용에 학생들은 오로지 오체투지의 심정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 강의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꾸홍밍이 ‘서양인의 눈에는 인기’가 있었던 재능에 대해 중국인들의 눈에는 괴팍한 인물로 보였다.
그의 괴팍함을 열거해보면 평생 동안 만주족들이 입는 장포(長袍) 마과를 입고 변발을 하고 다녔으며,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고 기생집 다니기를 좋아했다.(2008년 12월 19일, 中信望-華文摘報, 張桂亭의 ‘大公報’에 발표한 글에서 인용)
꾸홍밍의 명성도 점차 뚜렷해졌다. 꾸홍밍이 베이징대학에서 강의할 때 공개적으로 “우리가 왜 영문 시를 배워야만 하는가? 그것은 여러분들이 영어를 잘 배운 뒤 우리 중국인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온유하고 후덕한 시가들을 그러한 오랑캐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해 중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883년부터 영자신문인 <화북일보(華北日報)>에 ‘중국학’을 주제로 다양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글은 중국문화를 선양하고, 서양학문을 풍자했다. 그는 중국의 전적 <논어>와 <중용>, <대학>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해외간행물을 중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그동안 중국의 고대 경전이 제대로 된 영어번역본이 등장하게 됐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꾸홍밍은 다섯 차례에 걸쳐 172가지의 <중국예기(中國禮記)>를 발표해 동방문명의 가치에 관한 주장을 계속했고, 영문으로 된 <중국의 옥스퍼드운동>을 발표했는데 이 글은 유럽에서 유명세를 탔고 특히 독일에게는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 이 책은 일부 철학과의 필독도서로 지정됐다. 1915년에는 유명한 <춘추대의(春秋大義), 유명한 ‘중국인의 정신’을 의미한다>를 출판했다. 이 책의 독일어판은 1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에서 매우 주목을 받기도 했다.
꾸홍밍의 이러한 복고적인 태도에 대해 당시 천두수(陳獨秀), 후스(胡適) 및 차이위엔페이(蔡元培) 등 신문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당시 후스는 중구의 전통적인 것을 모두 버리고 서양화를 해야 한다는 ‘전반서화론(全般西化論)’으로 국가를 구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와 관련된 논쟁은 심했다. 마침내 1923년 차이위엔페이가 베이징대학 총장직을 그만두자 꾸홍밍도 사직하게 됐다.
꾸홍밍은 일순간한가롭게 집에서 소일하게 됐다. 얼마 뒤 소개로 일본인이 설립한 영어신문사의 편집장이 됐다. 봉급은 5백 위안이었고, 매우 큰 돈이었다. 그는 이러한 일에 대해 “중국인들이 골동품을 제대로 몰라보고 외국인에게 팔아버렸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1901년 청조정이 ‘유학을 한 전문가’라는 명예로 그를 과거시험의 ‘문과집사’라는 명예를 수여했다. 일생동안 황제를 존중해왔던 꾸홍밍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접견했고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 꾸홍밍은 타이완으로 가서 강의를 하기도 했고 1927년 가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인 1928년 4월 30일 81세를 일기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국근대사에 명사로 논하거나 풍류를 말할 때 아마도 꾸홍밍을 첫손가락을 꼽아야할 것이다. 그는 모순을 지니고 복잡했던 인물이었다고 평가된다.
운위엔링[溫源寧, 1899-1984, 광둥루펑(廣東陸豊) 사람으로 영국캠브리지대학 석사로 1925년부터 베이징대학 영문학과 주임교수로 할동했고, 1935년 린위탕(임어당) 등과 영문학술잡지 <천하>월간을 발간했으며, 1936년 국민당입법위원, 1946년 국민대회대표, 1946년에는 국민정부의 그리스대사를 역임했고, 1968년 이후 타이완에서 사망할때까지 거주했다. 영문으로 된 인물수필집인 《절반만 안다네(一知半解)》를 펴냈다] 은 꾸홍밍을 ‘중국근대에 가장 재미있는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꾸홍밍은 중국문화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중국의 고유한 문화를 전파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영국인은 넓게 알지만 깊이가 없고, 독일인은 정밀하고 깊이는 있지만 넓지 못하다. 오로지 중국만이 넓고 깊이가 있을 뿐이다.(深圳新聞綱, 2008년 1월 31일에서 재인용)라고 했다.
그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보자. 한번은 꾸홍밍이 영국의 버스를 타고서 영자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자 이를 본 영국인들이 그를 조롱했다. 영어도 모르는 친구라고..영국인들의 비웃움이 끝나자 그는 유창한 영어로 담담하게 말했다. “영어가 너무 간단해서 거꾸로 보지 않으면 재미가 없구만!”이라고.
구홍명이 서양의 모든 언어에 능통하다는 소문은 주중 외국저명인사들에게 소문이 퍼졌다.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이 조상들에게 굽혀 인사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면 당신의 조상이 식탁에 있는 음식을 먹는가·”라고 비웃자, 꾸홍밍은 곧바로 대꾸하길 “그렇다면 당신들은 조상의 묘지에 헌화를 하는데 너희들은 너희 조상들이 꽃향기를 맞는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박했다.
한번은 영국의 유명한 작가인 윌리엄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중국을 방문하고 꾸홍밍을 만날 생각이었다. 몸의 친구가 먼저 꾸홍밍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꾸홍밍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몸이 직접 꾸홍밍의 집을 방문했다.
꾸홍밍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몸에게 “당신 영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쿠리(苦力)가 아니면, 매판(買辦)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국인들이) 손짓만 까딱해도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비난하자 몸은 입장이 매우 난처했었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괴짜 유학자’ 꾸홍밍은 중국의 봉건사회 마지막 끝자락에 서서 동서양을 모두 살펴본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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