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양규완
  • 승인 2019.06.0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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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록학의 개척자(12) 

 

동성은 중앙대학을 다닐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1학년때부터 중대신문 자매지인 영자신문 중앙헤럴드 견습기자, 기자,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학부 졸업 후에는 나와 같이 충장 비서실에 근무하다가 내가 197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자 나에 이어 영자신문 5대 국장을 역임했다.

나는 법학과를 졸업 후 4대국장 겸 비서직을 겸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동성은 나에 이어 5대 국장 겸 비서직을 겸하다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후,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교수가 됐다. 중앙헤럴드 1대국장부터 3대국장(1대 이기춘, 2대 국응도, 3대 임풍호)까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모두 미국에 정착했다.

 곽복산은 1935년 귀국해 사회부 기자가 된후 동아일보가 일본 총독부에 의해 강제폐간될 때 까지(1935-1940)열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기자 생활을 했다. 그는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1945년 해방이 될 때 까지 일했다. 곽복산의 심적인 고뇌가 있었다면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기자생활(1940-45)을 한 것이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곽복산은 동아일보 복간 준비위원이 됐다. 그해 12월 동아일보가 복간이 되자 사회부장 겸 논설위원이 됐다. 그후 그는 한국전쟁(1950-53)으로 피난시절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 제주신문 주필을 역임했다. 

곽복산은 제주신문 주필 당시 부정축재 폭로 사건으로 1개월 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부산 피난시절인 1952년 3월 동아일보에 3번째 입사 그해 4월까지 1개월간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3. 신문연구소

곽복산은 1945년 해방이 되던 해부터 언론인 교육과 언론학에 대한 학문적 구상을 했다. 그가 처음 구상한 것은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문연구소(1910)나 일본 동경대학의 신문연구실(1929)과 같이 대학에 신문연구소를 두고, 신문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기자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곽복산은 1946년 1월 조선신문연구소를 창립했다. 그러나 연구소는 거의 1년간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지 못하다가 그해 12월5일 신문과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정식 발족했다. 

이 연구소는 본부를 서울 남대문로2가 한남빌딩(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두었고 연희대학 안에 신문연구실을 두어 주요 신문, 통신사의 간부를 중심으로 대학과의 관계를 꾀하는 한편 신문을 비롯해 라디오, 영화, 보도부문까지 조사연구를 병행하면서 신문기자 양성에 주력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임원진에는 소장에 백낙준(연희대 총장), 이사에 장이욱(서울대 총장), 현상윤(고려대 총장)), 이병기(서울대 교수), 김동성(합동통신 회장), 설의식(동아일보 주간)이 포함됐다. 그리고 실무진으로 곽복산(동아일보 사회부장)이 상무이사로, 이해창(한성신보 체육부장)이 총무국 간사로 내정 되었다. 임원진에 한국을 대표하는 연희대, 서울대 그리고 고려대 총장이 모두 참여했다는 것은 언론에 대한 관심과 기대 그리고 위상이 그만 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문과학연구소 역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실질적 책임자인 곽복산이 구상한 신문과학연구소가 독일의 신문연구소(1910)나 일본 동경대학의 신문연구실(1929)을 모델로 했던 자체가 무리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가 모델로 한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은 1409년 독일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14개의 학부, 150개의 연구소와 140개의 학과가 있는 전통있는 대학이다. 독일 최초의 대학은 1386년 설리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다. 그리고 독일 대학의 연구소 소장은 총장이나 외부인이 맡는 자리가 아니라 그 대학의 전문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고 존경을 받는 교수가 맡는 자리다. 대학 총장이 아무리 능력과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문이나 언론과 같은 전문적인 분야의 소장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의 동경대 역시 1877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설립된 명문대학이다. 동경대학이 1929년 신문연구실을 개설했다는 것은, 대학에 별도의 신문학과가 없더라도 신문이나 언론에 관해 조예가 깊과 권위 있는 교수가 설립을 했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실제로 1929년 동경대학에 신문연구실을 설치한 소야수응 박사는 동경대학에 근무하던 일본 신문학의 선구자였다. 소야수응박사는 그후 1932년 일본 상지대학에 일본에서 최초로 신문학과를 설립했고, 같은 해 곽복산은 1기로 상지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해 1935년 졸업을 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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