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가면 자금성은 못봐도 꾸홍밍은 봐야한다?
중국에 가면 자금성은 못봐도 꾸홍밍은 봐야한다?
  • 한인희
  • 승인 2009.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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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학문에 능통했던 괴짜 유학자, 꾸홍밍 <상>

꾸홍밍(辜鴻銘)은 중국 근대 전통 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다. 20세기 초 서양인들 사이에는 “중국에 오면 자금성의 3대전을 못 봐도 꾸홍밍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도대체 꾸홍밍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런 말이 전해졌을까?
중국의 횡린중학(橫林中學)의 양지(楊洁)의 <꾸홍밍에 관한 기록(記辜鴻銘)>에 따르면, 그는 남양(南洋)의 말레이반도 서북쪽의 패낭에서 태어났다. 공부는 서양에서 했고, 결혼은 중국여자와 했으며, 북양정권에 관료를 지내기도 한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더해 영어, 프랑스, 독일어, 라틴어, 희랍어, 말레시아어 등 9개 언어에 능통했고 박사학위만 13개였던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의 태도는 특별했는데, 영자신문을 거꾸로 읽으면서 영국인들을 조롱했고, 미국인들에게 문화가 없는 나라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인 최초로 <논어>와 <대학>, <중용> 등 중국이 고전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해 서양에서 중국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꾸홍밍은 당시 세계적인 인물들과도 교류했다.
일본의 수상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공자의 학문을 강의했고, 대문호인 레오 톨스토이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세계문화와 국제정세를 논했으며, 인도의 성자 간디로부터는 ‘가장 귀중한 중국인’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한편 그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천두수(陳獨秀)로부터는 ‘복고후퇴’의 괴물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신문화 운동을 했던 개혁 성향의 인물들로부터는 ‘늙은 완고파’ ‘썩은 유학자’라는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꾸홍밍의 자는 탕생(湯生)이다. 1857년 7월 18일 남양의 말레이반도 서북쪽의 패낭의 영국인이 경영하는 고무나무 플랜테이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중국의 푸젠(福建)에서 남양으로 이주한 뒤 부를 쌓아 명망이 높았던 집안이었다.
아버지 구츠윈(辜紫雲)은 당시 영국인이 경영하는 고무나무 플랜테이션의 총감독관이었다. 그는 민난어(푸젠성의 사투리)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영어와 말레이어도 할 줄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금발 벽안의 서양인으로 영어와 포르투갈어에 능통했다. 이러한 가정적인 배경 하에서 성장한 꾸홍밍은 다양한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질을 갖게 되는 배경이 됐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언어에 대한 특별한 기억력과 이해력을 갖게 됐다.
고무나무 플랜테이션의 주인인 영국인  브라운은 꾸홍밍을 무척 아꼈다. 친자식이 없었던 브라운부부는 꾸홍밍을 양자로 삼았다. 브라운 부부가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꾸홍밍은 영국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구홍민의 아버지는 아들을 조상의 위패 앞에 세워놓고 향을 사르면서 외국생활에 대한  당부를 했다. 아버지의 당부는 “네가 어딜 가든지, 네 주변에 영국인이나 독일인, 아니면 프랑스인이 있든 간에 절대로 잊지 말거라. 너는 중국인이다”라는 말로서 이제 겨우 10살이 된 꾸홍밍에게 마음속 깊이 중국인임을 각인시켰다.     
1867년 10살의 꾸홍밍은 브라운부부를 따라 영국의 에딘버러로 왔다. 애딘버러에 도착한 꾸홍밍은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의 대서사시《실락원》(失樂園, Paradise Lost)을 외우는 것으로 서양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양아버지로부터 서양의 것을 배우면서 모든 책을 외우기 시작했다. 영국의 르네상스시기 최고의 걸작품인《실락원》은 전체가  6,500행이 넘는 음율로 되어 있었지만 어린 꾸홍밍은 금방 외워버렸다. 이어서 그는 밀턴의《복락원》(復樂園, Paradise Regained) 등 위대한 대서사시도 모두 외웠다. 서양에서는 이렇듯 좋은 글을 외우는 전통이 있었다. 외우는 일과 관련해 꾸홍밍의 오랜 친구였던 량둔엔[梁敦彦, 1857-1924, 광둥 쉰더(廣東順德)사람으로 조부 량쩐팡(梁振邦)은 홍콩에서 의사를 지냈고, 아버지 원레이꿍(文瑞公)은 남양에서 사업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영어를 잘했으며, 홍콩의 영국인학교에서 공부했다. 1873년 중국정부가 처음으로 미국에 30명의 유학생을 파견했을 때 선발되어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특히 야구를 잘했다.
유학생들이 변발을 자른 이유 때문에 유학 3년 만에 전원 귀국조치를 당했다. 당시 중국인 최초로 철도를 설계했던 짠티엔요우(詹天佑)만이 공과대학을 졸업했는데 그는 3년 만에 학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귀국 뒤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치고 1917년 ‘복벽’에 가담해 북양정부의 체포령이 떨어졌지만 해제된 뒤 텐진(天津)에 거주하다가 1924년 5월 10일 병사했다)의 증언에 따르면 꾸홍밍이 60세가 넘었을 때도《실락원》을 한자도 틀리지 않게 외우더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에딘버러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꾸홍밍은 섹스피어의 희극을 외우고, 독일어로 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도 외우기 시작했다. 당시 구홍명은 독일어를 전혀 모를 때였다. 양아버지 브라운이 한 구절을 읽으면 꾸홍명이 따라서 읽는 방식이었다.
이는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손발을 맞추어 춤을 추는 듯했다. 그렇게 웅얼거리면서 <파우스트>를 모두 외워버렸다. 양아버지 브라운은 꾸홍밍에게 한 단어씩 꼼꼼히 해석을 해주었다. 때로는 독일어로, 때로는 영어로 설명하면서 마침내 <파우스트>가 마치 꾸홍밍의 배 가죽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완벽하게 외울 수 있었다.
이러한 에피소드의 배후에는 ‘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스스로 희랍어를 배우면서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결국 이처럼 계속  좋은 문장을 외우면서 희랍어, 라틴어로 된 글도 외웠다. 그러자 다른 나라 언어와 문자를 한번 배우면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꾸홍밍은 에딘버러대학에서 공부하게 됐다. 입학과 함께 당시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이자 저명한 작가이면서 철학가였던 토마스 카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을 만나게 됐고 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후 그의 학문적 열정은 독일의 라이프니츠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프랑스 파리에서는 서양의 종교를 접하게 됐다. 이렇게 해 꾸홍밍은 마침내 서양학문에 정통한 사람이 됐다.
이렇게 해 9가지 종류의 언어의 벽을 넘어선 사람이 됐다. 이후 차이위엔페이(蔡元培)가 독일의 라이프니츠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꾸홍밍의 명성은 독일에서 풍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40년 이후 린위탕(林語堂)이 라이프니츠대학에 왔을 때 꾸홍밍의 저작은 이미 학교가 지정한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 14년간 유럽의 학문을 섭렵한 꾸홍밍은 이제는 서방문화에 정통한 청년학자로 변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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