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이 상 철
  • 승인 2019.05.2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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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12)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40대에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 시도어 루스벨트(42), 케네디(43), 클린턴(46), 오바마(47)를 포함 해 9명이나 되는 것도 40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헌법(2조1항)에 의햐면 미국의 대통령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출생해야하고, 미국에 14년 이상 계속 거주해야 하고, 연령은 35세가 돼야한다.  

요즘은 30대 후반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 전, 프랑스의 매크롱이 39세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뉴질랜드에서도 30대 후반에 총리에 당선된 것을 보아도 30대 또한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곽복산은 1945년 8.15 해방(1945.8.15)이 되자 동아일보 복간 준비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같은 해 12월1일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회부장 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그리고 40세 때인 1950년, 6.25동란으로 부산피난 시절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말하자면 곽복산은 40세  때 편집국장으로 신문현업의 절정기를 맞은 셈이었다.

곽복산은 나이로 보나 시대적 상황으로 보나 신문현장에서 일하기 보다 비교적 연령의 제한을 덜 받고 보다 비전이 있는 신문학 교육에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보겠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더라도 해방 후 신문발간이 등록제로 바뀌면서 하루 밤 사이에 24개의 일간지가 난립 할 정도로 신문홍수 현상을 이루었으나 신문사에서 일할 기자를 위한 교육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와 관련해 곽복산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역임하면서 194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교육의 효시라고 할수 있는 조선신문연구소를 설립했다.당시 스탭진을 보면 소장에 백낙준 연희대 총장, 이사에 장이욱 서울대 총장, 현상윤 고려대 총장, 김동성 합동통신 회장, 설의식 동아일보 주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요 실무진으로는 상무이사에 곽복산 동아일보 사회부장과 이해창 한성일보 체육부장이 됐다.

이 스탭진을 보면 한국의 주요 대학인 연세대, 서울대, 고려대 총장을 포함해 통신사 사장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곽복산 교수의 인격과 리더십이 크게 작용 했음을 알 수 있다.배(adore)했다.

  1. 학창시절

곽복산은 15세 때인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의 중고등과정 통신교육을 마치고 2년 후인 1927년 귀국 해 동아일보의 지방주재 기자로 일을 했다. 2년 간 지방주재 기자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열정만 가지고는 기자로서 성공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일본대학 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한데 이어 같은 해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하과를 2년 수료했다. 그가 정치경제학과2년 을 수료하던 해인 1932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상지대학(소피아)에 신문학과가 개설 되었다. 

당시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한 것은 기자로서 성공을 하기 위한 신문학 이었으나 신문에 관한 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정치경제학과를 2년 다니다가 마침 상지대학에 신문학과(3년)가 개설되자 1기생으로 입학을 해 1935년 졸업을 했다. 그후 곽복산에 이어 이해창과 박유봉도 상지대학 신문학과를 나와 일본 메이지대 신문고등연구과를 나온 최준과 함께 한국의 1세대 언론인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이들 네명을 가리켜 한국언론의 4비조로 부르기도 한다. 박유봉은 상지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 신문기자

곽복산이 신문기자로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35년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한 후 24세 때인 1935년 4월 동아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재 입사 하면서 부터였다. 

곽복산의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남 달랐다. 그가 사회부 기자로 평양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인 1936년 동아일보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11개월 간 정간되었다가 복간이 되자 이 기쁨을 감출 길이 없어 한 가지 독특하고 잊지 못할 결심을 하게 됐다. 

곽복산은 동아일보의 복간 2년 후  첫 아들을 낳자 장남 이름을 가문의 돌림자가 아닌, 동아일보의 첫째자인 동 자와 셋째자인 일 자를 따서 “동일”로 지었고 그후 1남3녀를 더 두었는데 그들 이름도 동아일보의 동자를 돌림으로 해서 동성(차남), 동임(장녀), 동실(차녀), 동희(3녀)로 지었다. 곽 교수는 내가 그를 만날 때 마다 자녀들 이름을 동아일보의 동자로 지은 것에 대해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곽복산의 둘 째 아들인 동성은 특히 나와 인연이 깊다. 내가 청량리 홍능에 있는 곽복산 교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동성을 만났다. 곽 교수 말이 동성은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후 그는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다녔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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