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이상철교수의 건강과 행복 메시지
  • 현대일보
  • 승인 2019.04.29 19:10
  • icon 조회수 26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나의 스승, 곽복산

그리고 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동성을 소개시켜 주었다. 곽 교수는 둘째 아들인 동성이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도 일년 재수를 하고 중앙대학에 들어와 재수의 고충과 번민도 알기 때문에 동성에 대해 정이 갔다.

동성은 다음 해에 중앙대학의 경제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그는일 학년 때부터 나와 같이 학부 때는 중앙헤럴드의 견습기자, 기자, 편집부장을 지냈고 졸업 후에도 나와 같이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내가 197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자 5대 편집국장과 비서직을 겸했다. 동성은 그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경영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곽복산 교수와 식사에 관해 잊지못할 일화가 있다. 한번은 학교 교문앞 문밖에 있는 중국식 음식점(영합)에서 지한 검은 안경(선 스래스)를 낀 곽복산 교수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당시 짜장의 면은 수타면이었기 때문에 면이 쫄깃쫄깃해 맛이 있었다.

나는 짜장은 남겨두고 면만 골라 먹었다. 나는 지금도 밥에 검은콩을 두어 밥이 검게 보이면 별로 입맛이 당기지 않는다. 흰 면만을 골라먹는 것을 지켜보던 곽 교수는 “자네 진짜는 안먹고 가짜만 먹으면 어떻 게 하느냐”고 말했다. 이후부터 나는 짜장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검은 짜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다방에서도 곽 교수와 비교적 자주 만났다. 1960년 대에는 다방이 흔치 않았다. 학교 근처인 흑석동에는 물론 다방이 없었고 시내 중심가, 몇 곳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 학생이 다방을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곽 교수가 초대해 서울역 근처의 다방(월계수)을 처음 가 보았다. 내가 대학원을 다닐 때 만 해도 학생이 다방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내가 곽 교수를 따라 다방에 처음 갔을 때 받은 인상은 교수나 문인 그리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만남과 대화의 장소로 기억된다.

그 후부터 나와 곽 교수는  같은 다방에서 자주 만나 나의 논문에 대한 지도와 조언도 해 주었고 과거 곽 교수 생애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그리고 나의 논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곽 교수는 “자네는 학부서 법학을 전공했으니 이와 과련된 논문을 쓰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논문 제목을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연구”에 관해 쓰기로 했다. 곽 교수는 또한 나의 논문이 생각보다 늦어지자 “논문이 별거냐” 하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논문이 별거냐 하는 곽 교수의 말은 논문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가해 쓰라는 말이었다.

논문이 별거냐 하는 말에는 또 다른 함의가 있댜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스승이란 제자에게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제자가 학문과 관련해 할 일을 일깨워주고 이를 이행하도록 용기를 심어주는 조언자라는 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1966년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 4학기 째인 1967년 말(11월)이면 논문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서실 근무와 영자신문을 책임맡고 있었기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논문쓰는 것을 미루다 보니까 거의 포기상태였다.

내가 논문 쓰는 것을 미룬 또 다른 이유는 곧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곽 교수의 끊임없는 격려와 “논문이 별거냐” 하면서 재촉도 하고 격려도 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논문을 마칠 수 있었고 지금도 이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결과 1년반(3학기)이 늦게 논문을 마칠수 있었다. 나는 가끔씩 당시를 생각하면 기쁘고 행복하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데 끝을 맺지 못했다면 지금 얼마나 아쉽고 후회스러울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논문심사가 있기 바로 수일전 지도교수인 곽복산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내용은 최준교수(방송학)가 “자네 논문은 최준이 아니면 절대 통과 시키지 못한다”고 하니 당장 지도교수 이름을 마꾸라고 했다. 그래서 부랴 부랴 지도교수를 최준으로 바꾸어 석사학위를 받게 됐다. 석사학위 심사위원은 곽복산, 최준, 박유봉(한양대)였다.

추측컨대 당시 석사학위 후보가 몇 명에 불과했는데 모두 곽복산을 지도교수로 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으로 생각된다. 중앙대하교 신문학 석사 1호는 당시 중대신문 편집국장이고 신문학과 강사이던 최진우 였다. 그 다음으로 리대룡(중앙대 광보학과 창설 및 초대 주임교수), 김종완 그리고 본 연구자가 석사학위를 받았다. 

                  <다음주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