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이지는 않지만 ‘애국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
‘혁명적’이지는 않지만 ‘애국적’인 삶을 살다간 여인
  • 한인희
  • 승인 2009.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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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여자 대학총장, 양인위<하>

1925년 1월 18일 국립여자사범대학 학생자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전체 237명의 학생 중 172명이 양인위의 사퇴를 결정했다. 학생들은 양인위의 국립여자사범대학 총장직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교육부에 양인위의 총장직을 박탈해달라는 요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교육청장(교육부장관)은 마수룬(馬淑倫) 차관이 직무대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양인위의 사직에 찬성하고 있었다. 4월에 이르러 장쓰젠(章士劍)이 사법총장 겸 교육총장을 겸임한 뒤 사태가 일변했다. 장쓰젠은 학생들이 공연히 문제를 만드는 일에 반대를 하면서 공개적으로 양인위를 지지하게 됐다.
1925년 5월 7일, 일본이 중국과 강제로 체결한 ‘21개조’의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양인위는 ‘국치기념일’ 명의로  강연회를 개최하고 외부 인사를 초청해 특강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녀가 사회를 보기 위해 강당의 무대로 오르자 퇴학 조치를 당한 학생들의 야유 소리가 들렸다. 5월 9일, 그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자치회의 간부 6명에 대해 퇴학조치를 했다. 그 가운데 류허쩐(劉和珍)과 쉬광핑(許廣平)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태는 새로운 구면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5월 11일, 흥분한 전교생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양인위총장을 학교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하면서 총장실을 봉쇄하고 <양인위축출운동특간>이라는 인쇄물을  발행해 총장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저명한 작가 루신(魯迅)은 쉬광핑과 연예 중이었다. 이때 쉬광핑과 연예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됐다.
루신은 양인위 총장의 처사에 대해 불만을 갖고 학생들의 입장을 동정하고 있었다. 그리해 루신은 5월 12일 <징빠오부간(京報副刊)>에 “갑자기 생각나는 일(忽然想到)(7)”이라는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국립여자사범대학의 사태에 대해 양인위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양인위를 ‘양의 탈을 쓴’ 인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밖에도 <과부주의>라는 글에서 루신은 “과부 혹은 과부같은 사람이 설립한 학교에서 정당한 청년은 생활할 수 없다. 청년은 당연히 천진난만해야만 하고 그녀처럼 음침하고, 사악해서는 안 된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양인위를 신랄하게 비난을 가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양인위는 5월 20일 <천빠오(晨報)>에서 “폭력을 가하는 학생에 대한 유감”이라는 글에서 6명의 학생을 퇴학시킨 조치에 대해 입장을 설명하고 루신에 대해서도 비난을 가했다. 이 사건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로 확대됐다.
마침내 5월 27일 <징빠오(京報)>에서는 루신 등이 참가하는 7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북경여자사범대학풍파선언”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서명하면서 공개적으로 양인위의 태도를 비난했다. 여기에 서명한 교수들은 대부분 국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저명한 교수들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역풍을 맞았고 양인위 총장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양인위의 조카이자 유명한 작가였던 양쟝(楊絳:저명한 학자인 錢鍾書의 부인)은 셋째 고모인 양인위가 봉건가정에서 성장하면서 결혼과 연예도 해보지 못하고 오로지 사회에 투신했기 때문에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중국내의 혁명분위기가 크게 변한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공직에서 실패한 양인위는 실의해 쑤저우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10여 년 동안 쑤저우여자사범학교, 둥우대학(東吳大學:지금의 쑤저우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0년대 중반 그녀는 여자보습학교인 ‘이락(二樂)여자학술연구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양인위의 삶에 새로운 상황이 다가왔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했다. 중국은 이른바 ‘8.13’ 항전에서 실패하고 상하이가 일본에 함락되고 말았다. 강남의 고성인 쑤저우도 적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양인위에게 일본에게 협조하기를 종용하고 높은 직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일본군은 쑤저우에서 살인과 강도 등 폭행을 자행했다.
양인위는 개인적인 안위를 포기하고 당시 쑤저우의 일본군총사령관 마쓰이(松井)를 찾아가 그의 부하들이 강간과 살인을 자행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를 하면서 ‘지상의 천당’인 쑤저우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을 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한 경험을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 명망가였던 양인위를 일본의 협력자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일본의 전략은 양인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자 일본군사령관 마쓰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부하들에게 양인위의 집 근처에 중국인들로부터 약탈한 재물을 고의적으로 쌓아놓기도 했다.
그러자 거리를 지나가는 부녀자들은 이를 보고 양인위의 집을 비켜가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이처럼 야비한 방법을 동원해 양인위를 압박했다. 그러나 이에 흔들릴 양인위가 아니었다.
마침내 쑤저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은 ‘일본통’인 양인위의 존재가 그들에게 이용할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애요인이라고 판단하고 부하들에게 ‘죽이도록’ 지시했다.
 그리해 1938년 1월 1일, 두 명의 일본군 병사가 양인위 집에 도착했다. 이들은 양인위에게 ‘상관으로부터 초청’이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자 양인위는 아무런 의심 없이 집을 나섰고, 그녀 뒤를 두 명의 일본군 병사가 따랐다. 쑤저우의 어느 다리 위에 이르자 일본군 병사가 갑자기 그녀에게 총격을 가했다. 다른 한 명의 병사는 총에 맞은  그녀를 다리 아래 강물로 밀어버렸다.
다리 아래 강으로 떨어진 양인위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그들은 재차 총격을 가했다. 강물은 핏빛으로 가득했고 양인위의 사체는 떠내려갔다. 이때 다리 근처에 살고 있던 용감한 목수가 일본군이 사리진 이후 사람을 불러 모아 양인위의 시신을 뚝으로 끌어올렸다.
그 형상은 목불인견이었고 이렇게 해 시신을 수습했다. 양인위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고 보니 관이 너무 작고 얇았다. 관을 바꾸려고 했으나 이미 사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해 다시 큰 관재로 한 겹을 덧대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직접 목도한 조카 양쟝은 침통하게 당시를 회고하면서 “셋째 고모와 내 어머니는 같은 날 장례를 치루셨다, 내가 보니 어머니 관 뒤에 셋째 고모의 이상하게 생긴 관이 따르고 있었다. 고모의 관은 여기저기 덧대고 옻칠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었다.
마치 한 시대를 울퉁불퉁한 굴곡의 시기를 보낸 고모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나의 고모를 회고하며>) 이렇게 보면 그녀의 삶은 비록 ‘혁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애국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봉건시대의 남녀 차별을 극복하고 최초의 대학 총장이 된 양인위는 사회적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했으나 국가의 위기 때 각성을 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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