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3)
[현대일보 칼럼] 곽복산, 한국 언론과 언론학의 개척자 (3)
  • 이상철
  • 승인 2019.02.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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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문연구소

곽복산이 1945년 해방 될 당시 나이는 34세였다. 인생에 있어서 30대 중반이면 가장 중요한 시기다. 곽복산은 해방이 되면서부터 언론과 언론학 교육에 대한 학문적 구상을 했다. 그가 처음 구상한 것은 신문학원이 아니라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문연구소(1910)나 일본 동경대학의 신문연구실(1929)과 같이 대학에 신문연구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곽복산이 구상한 신문연구소의 성격은 대학원 수준의 연구소를 설치해 신문의 학문적 연구와 기자 교육을 병행해 실시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연구소 입학도 대학졸업자 또는 졸업예정자로 자격을 제한했다. 이를 위해 곽복산은 1946년 1월 조선신문 연구소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 연구소는 거의 1년간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지 못하다가 그해 12월5일 신문과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정식 발족했다. 이 연구소의 본부는 서울 남대문로 2가 한남빌딩(현 롯데백화점 자리)에 두었고 연희대학(현 연세대학)에 신문연구실을 따로 두었다. 

이 신문연구소와 신문연구실의 사업게획은 주요 신문, 통신사의 간부를 중심으로 대학과의 관계를 꾀하는 한편 신문을 비롯해 라디오, 영화, 보도 부문까지 조사, 연구를 병행하면서 신문기자 양성에 주력한다는 것이었다. 

임원진에는 소장에 백낙준(연희대 총장), 그리고 이사에 장이욱(서울대 총장), 현상윤(고려대 총장), 이병기(서울대 교수), 김동성(합동통신 회장), 설의식(동아일보 주간), 상무이사에 곽복산(동아일보 사회부장), 총무국 간사에 이해창(한성일보 체육부장)등이 추대됐다. 

임원진에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대, 연희대(연세대), 고려대 등 3개 대학 총장과 거의 모든 주요 신문사와 통신사의 임원이 참여했다는 것은 당시 언론에 대한 기대와 관심 그리고 위상이 그 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곽복산이 동아일보의 사회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인맥과 개인적인 역량, 리더십이 크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신문연구소와 신문연구실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곽복산 이었지만 가장 적극적이고 영향력 있는 후원자는 소장을 맡은 백낙준이었다. 백낙준은 1895년 생으로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8년 파크대에 입학을 해 역사학을 전공했고 1925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디.

1927년에는 예일대학에서 종교역사를 전공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논문젠목은 “기독교 전파에 있어서 출판물의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백낙준은 이같이 언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 양성기관의 모체였던 신문과학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연희대학에 신문연구실을 설치했다. 백낙준은 연희대 총장과 초대 연세대 총장 그리고 한국동란 중에는 문교부장관(1950-52)을 역임했다. 

2. 신문학원

1) 시대적 상황

언론학 관련 신문학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한국지배(1910-45)는 처음부터 언론통제와 문화말살 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로 인해 1910년 한일합병부터 1919년 3.1운동이 있기 까지는 대한제국 당시의 모든 민족지들이 강제 폐간되고 일제 총독부 기관지만 남게 되었다. 우리 민족지가 없는 이 시기를 1차 언론암흑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그리고 서울프레스(Seoul Press) 밖에 없었다. 

경성일보는 일어신문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매일신보는 한글 신문으로 베셀(Bethel)이 설립한 대한매일신보를 매일신보로 제호를 고쳐 발행했는데 한국인 독자를 위한 것이었다. 서울프레스는 영문 신문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국제적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미국의 메네소타 대학의 도서관(Wilson Library)엘 가 보면 서울프레스의 원본 일부가 잘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 이후인 1920년 상업지인 조선일보와 민족지인 동아일보의 발간(1920-1940)을 허용했으나 1940년에는 이 두 신문마저 강제 폐간됐다. 이 시기를 한국언론의 2차 암흑기로 부른다. 

그러나 일본의 2차 대전 패배와 한국에서 미군정(1945-48)이 들어서면서부터 신문발행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었다. 이 결과 누구나 원하면 신문을 발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신문의 홍수현상을 가저와 하루 밤 사이에 24개의 일간지가 나오는 기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1947년 미군정의 발표에 의하면 남한에만 85개의 일간지(주간지 68개, 격주간지 12개, 월간지 154개)가 발행됐으며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0개 일간지가 서울에서 발간됐다. 

신문의 이 같은 홍수현상은 그만큼 많은 기자의 양성이 절실했음을 의미했다. 기자의 양성과 훈련은 단순한 등록에 의한 신문이 수적 증가와 달리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문의 양적증가에 비해 신문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기자는 거의 전무했다. 기자의 양성과 훈련은 절실했지만 기자를 교육시키고 양성하는 기관도 전무했다.     <다음주에 계속>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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