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도 족쇄’ 벗어나 당당한 신여성으로 …
‘봉건제도 족쇄’ 벗어나 당당한 신여성으로 …
  • 한인희
  • 승인 2009.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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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여자 대학총장, 양인위<상>

양인위(楊蔭楡)는 1884년 쟝수성 우시(無錫)의 지식인 집안 출신이다. 양인위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북양정부(北洋政府)에 충성한 인물로 저명한 문학가 루쉰(魯迅)의 비난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뒤 침략자 일본인들이 그녀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단호히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병사들이 고의적으로 저격해 사살함으로써 54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친 애국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 양라오푸(楊老圃)는 당시의 변호사였다. 집안에서는 여섯째였다.
양인위보다 6살이 많았던 오빠 양인항(楊蔭杭)은 남양공학(南洋公學)의 국비유학생으로 1899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했다. 그는 선각자로 1900년 청말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간행물을 발간해 혁명사상을 고취했다.
그는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루소의《민약론(民約論) Du Contrat Social,(1762)》과 몽테스키외의《법의 정신((프랑스어: Esprit des Lois), 1748년) 》를 중국에 최초로 소개한 인텔리였다. 양인위는 이러한 인텔리 오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한 오빠 양인항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작가인 첸종수(錢鍾書)의 부인 양쟝(楊絳)의 부친이었다. 양장의 회고에 따르면 “내가 듣기에 우리 집안은 큰고모는 예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둘째고모와 셋째고모는 예쁘지 않아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받지 못했고 누구로부터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들 자매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나의 고모를 회고하며>). 여기서 말하는 셋째고모가 바로 양인위이다. 
양인위는 1901년 18살이 되자 부모의 명에 따라 한 번도 본적도 없는 우시(無錫)의 창저우(常州)에 살고 있는 성이 장(蔣)씨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첫날밤 양인위는 남편이라는 자가 너무도 못생기고 잇몸이 드러나고 입가에 침을 흘리는 저능아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첫날밤 신랑의 빰을 때리고 다음날 친정으로 돌아와 버렸다. 물론 파혼의 책임으로 모든 비용을 물어준 것은 물론이었다. 이후 양인위는 평생 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이처럼 봉건적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깨닳게 된 양인위는 사회생활에 헌신하게 됐다. 오빠의 도움으로 미국인이 설립한 쑤저우의 징하이(景海) 여학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당시 이 지역의 최고의 명문이었다. 학생들 대부분은 상류사회의 자제들이었다. 학비는 당연히 비쌌다. 2년간 공부를 마친 뒤 상하이의 우번(務本)여중으로 전학했다. 이 학교는 독립적인 사고를 하게 하는 신여성을 배출하는 사립여자학교였다. 이 학교는 베이징대학 총장을 지낸 차이옌페이(蔡元培)가 설립한 ‘애국여학교’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상하이의 명문이었다. 양인위의 동창생 중에는 저명한 학자인 장타이옌(章太炎)의 부인이 된 탕궈리(湯國梨)여사가 있었다.
1907년 5월, 24살이 된 양인위는 상하이의 우번중학을 졸업하고 쟝수성에서 선발하는 국비장학생 시험에 참가해 합격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이해 7월, 일본으로 떠나 처음에는 일본의 아오모리(靑山)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에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이화학박물학과에 입학했고, 6년 뒤인 1913년 졸업을 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으로 돌아온 뒤 양인위는 교육자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이때 이미 중국은 봉건왕조가 무너지고 국민이 주인이라는 중화민국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1913년 쟝수성 제2여자사범(新蘇師範의 전신)의 교무주임이 되어 학생들에게 생물학을 강의했다.
양인위의 삶에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했다. 그의 베이징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1914년 베이징으로 직장을 옮기게 된다. 그녀는 국립여자고등사범학교(약칭으로 ‘女高師’라고 함)의 학감 겸 강습과 주임이 됐다. 그녀의 삶에서 새로운 시기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점이다.
이 시기 중국에서 여자가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란 매우 드문 경우였다. 1918년 교육부가 처음으로 미국 파견 유학생을 선발했다. 이 기회를 포착한 그녀는 미국 유학생에 선발되어 명문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수 있게 됐다. 그녀는 4년간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됐다.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근무했던 국립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그녀는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던 그날, 그녀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베이징역전에 나와 전송을 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이들도 있었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양인위도 창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손을 흔들며 눈물을 뿌렸다.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양인위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미국유학중국학생회회장, 류미중국교육학회회장을 맡았고 세계적인 교육학자로 존 두이(John Dewey)와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실용주의 교육학의 훈도를 받게 됐다. 유학을 떠난 지 4년만인 1922년 양인위는 컬럼비아대학의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교육에 종사했다.
이 시기는 그녀의 인생 중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 1924년 2월 국립여자고등사범학교의 전임총장이었던 쉬수상(許壽裳)이 사직을 하자 교육부는 파격적으로 양인위를 총장에 임명했다. 같은 해 학교명을 ‘국립여자사범대학’으로 변경했으며 양인위는 중국근대 역사에서 최초의 여자 대학총장이 됐다.
총장이 된 이후 그녀는 미국에서 배웠던 교육이론과 경험을 현장에 적용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학생들은 질서를 중시하고 학풍을 진작하고 학생은 공부만하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국부 쑨윈(孫文) 선생이 베이징에서 서거하고 애도기간마저도 학생들의 참가를 금지시킬 정도였다. ‘5․4운동’을 경험한 학생들은 이러한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교무행정 분야에 있어서도 융통성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로 인해 결국 문제가 터졌다.
1924년 9월과 10월 사이에 저쟝성(浙江省)의 루잉상(盧永祥)과 쟝수성의 지서위엔(齊燮元)이라는 군벌사이에 전쟁이 발생했고 거기에 더하여 남쪽 지방에 심한 물난리가 났다. 그러자 이 학교 국문학과 예과학생 몇 명이 여름 방학 집에 갔다가 이러한 긴급 상황 때문에 예정된 시간에 학교로 귀교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원칙을 내세운 학교 측에서는 이들에 대해 제적처분을 하고 퇴학조치를 단행했다. 객관적으로 이번 학교 규칙을 위반한 학생들의 문제를 처리할 때 양인위는 공정하게 처리를 하지 않았다.
특히 공교롭게도 평소에 고분고분하지 않던 학생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퇴학처분을 받은 3명의 국문학과과 상대적으로 양인위와 관계가 좋았던 학생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은 결과가 됐다. 결국 대부분의 교직원들은 총장의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갖게 됐다.
제적된 3명의 학생들은 총장에게 선처를 바라는 요청을 했고, 학생들도 그녀들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다. 학생들이 늦게 된 원인이 지방 군벌들 간의 전쟁 때문이었기에 정상이 참작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총장 양인위의 태도는 마침내 학생들의 시위로 까지 발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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