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소로와 월든 (6)
[현대일보 칼럼]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소로와 월든 (6)
  • 이상철
  • 승인 2018.10.2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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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는 월든 오두막에 세 개의 의자를 비치했다. 하나는 자신의 고독을 즐기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친구를 위한 것이며 세 번째 의자는 예기치 않게 방문객이 많을 때, 함께 앉을 수 있는 의자라고 했다. 

소로는 월든의 숲속에 살았지만 매일 또는 하루걸러 콩코드 마을을 찾아 한가하게 길을 걸었는데 마을의 가십거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했다. 

소로는 그리고 콩코드 마을에 들릴 때 무료식사(free meal)와 친구를 원하면 언제나 자신의 멘토르인 에머슨의 집을 찾았다고 했다. 소로가 콩코드 마을을 찾을 때는 언제나 한가하고 자유로운 오후였다. 소로는 월든의 숲 속에서 혼자 살았지만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소상이 알고 지낸다고 했다. 

소로는 자신이 월든 숲속에서 새와 다람쥐를 보고 즐기는 것 같이 콩코드 마을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즐긴다고 했다. 콩코드 마을은 자신에게 아주 위대한 뉴스편집실(great newsroom)이라고 했다. 

소로는  월든에 거주한지 첫 번째 해 여름이 끝날 무렵인 어느 날 오후 자신의 구두 한 짝을 수선하기 위해 콩코드 마을의 구두수선공을 찾았다.  

이때 마침 소로는 갑작스럽게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그 이유는 소로가 인두세(poll tax)를 내지 않았거나 혹은 버젓이 대낮에 상원의사당 앞에서 소나 돼지같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파는(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했다. 소로는 6년간 인두세를 내지 않았다. 

소로가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는 정부에 충성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용히 정부에 전쟁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했다.  

소로는 국가가 개인을 보다 높고 독립적인 권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국가도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소로는 그러나 다음 날로 석방돼 수선한 구두를 찾아가지고  월든으로 돌아왔다. 소로는 자신이 이때까지 살면서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느데 결국 국가를 대표하는 관원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소로가 하루 만에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소로의 체납된 인두세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소로는 이 체포 사건을 이렇게 말했다. 

경찰은 나의 영적인 자유에 미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몸을 처벌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소로는 어느 누구로부터 내적으로나 영적으로 강요당하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소로가 정부의 부도덕한 행위(노예매매)와 부당한 정부의 정책(멕시코 전쟁)에 대해 저항의 표시로 세금을 내지 않은 것은 당시 모든 성인(adult)에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 뿐 이었다. 소로는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고속도로세(highway tax)라든가 시민을 위한 교육세는 기

 

꺼이 냈다고 했다.    

미국은 멕시코 전쟁(1846-48)에서 승리해 6개주(뉴 멕시코, 캘리포니아, 우타, 네바다, 애리조나, 코로라도)를 합병했다. 멕시코 전쟁 후“젊은이어 서부로 가라”고 하는 서부개척운동이 활발히 전개돼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기회의 땅을 찾아 서부로 진출했다. 

소로는 필사적으로 자포자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문명사회의 미국 백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롭지만(legally free), 영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not spiritually free)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월든은 백인들은 필사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자신을 일의 노예로 만드는데 이런 삶은 노예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백인의 독백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자포자기적인 삶을 사는 문명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입는 옷에 의해 판단되고 세대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광적으로 새로운 패션을 쫓는다고 했다.

월든이 소로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생전에 출간한 두 권 책의 초안을 여기서 썼기 때문이다. 첫 번 째 책은 그가 1839년 형인 존과 일주일간 보트여행을 한 콩코드강과 메리맥 강의 일 주일(A Week on the Concord & Merrimack River)이었는데 존은 1842년 갑자기 사망을 했다. 

이 책은 그의 경험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그의 독서와 회고에 관한 것이었다. 이 책은 1849년에 출간됐는데 별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천 부를 인쇄했는데 100부 정도만 팔릴 정도로 실적이 저조했다.    

  

◇ 필 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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