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보 칼럼] 나의 결혼, 나의 행복(2)
[현대일보 칼럼] 나의 결혼, 나의 행복(2)
  • 이상철
  • 승인 2018.08.0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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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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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남과 인연

모든 것은 과정이 있듯이 결혼도 과정이 있다. 결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우선 만남이 있어야 하고 만남의 때도 중요하다. 그리고 인연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인이고 배우자가 연이다.

나와 배우자의 코드가 맞아야 한다. 코드는 2차원적인 이성에서 오기보다 3차원 적인 감성에서 오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이해하고 설명하기 힘들다.

나는 1974년 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기 전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미국인 가정에 2주간 머문 일이 있다. 스탠리 한(독일계, Stanley Hahn)이라고 하는 이집 가장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로 미네소타 대학을 나오고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부인은 다얀 이라고 하는 가정주부였다. 이 가정의 아이들은 막 내 아들은 친 아들이고 위로 두 명은 한국서 입양을 한 아이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스탠리 가정은 한국인 사회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안주인인 다얀이 나에게 한국서 온 여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미련 없이 거절했는데 그 이유는 지금은 여성을 만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을 온 목적은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학위를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로부터 5년 후인 1979년 나는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학위를 끝냈을 때였다. 하루는 가깝게 지내던 같은 학과의 미국인 친구(David Degerman)가 자신의 친구(Paul Imberi)가정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곳에는 호스트인 폴과 아내인 소정, 초대 손님인 데이빗과 그의 아내 임조, 그리고 미모의 한 여인이 와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나의 아내가 될 해옥이었다.

그 후 나는 내가 5년 전 처음 미국에 와 2주간 묵었던 스탠리 가정의 다얀이 한국 여성을 소개해 주겠다고 한 여성이 바로 안 사람이라는 것을 (안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이 때 나는 내가 안 사람과 인연을 맺기 위해 5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 했다. 그리고 인연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만남의 때가 중요함도 깨닫게 됐다.

아내인 해옥은 연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과 한양대학병원에서 간호사와 수간호사로 일하다가 나보다 1년 먼저(1973) 미니아폴리스로 이민(영주권자)을 와 미네소타 주에서 실시하는 RN(registered nurse)시험에 합격했다.

합격 후 미니아폴리스 시내에 있는 대형병원(North Memorial Medical Center)에서 정식 간호사(RN)으로 일하고 있었다.

해옥과 나는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보다 큰 꿈을 성취하기 위해 우연히 같은 도시에 와 각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인과 연이 맞아 결혼을 했고 보람과 행복을 느꼈다.

3. 결혼과 피로연

나의 결혼과 피로연은 좀 특이했다. 나는 1974년부터 미네소타 대학으로 유학을 와 그 다음 해인 1975년부터 미니아폴리스 근교에서 농장(20만평)을 운영하는 미국인 가정인 멜과 오드리를 알게 됐다.

내가 이들을 알게 된 것은 멜과 오드리(Melvin & Audrey Greehling)가  사는 락포드(Rockford)에서 매년 3월에 열리는 농업감사일(Agricultural Appreciation Day)을 기념하는 행사에  나를 초대하면서 부터였다.

미국서 농장의 크기는 20만평 정도 된다. 이는 1862년 링컨 대통령 때 자영농지법에 근거해 미국 서부의 미개발 토지를 젊은이들에게 한 가구당 160에이커(20만평)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토지 불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21세 이상으로 최소한 5년 동안 농사를 짓도록 의무화 했다. 이 무렵 “젊은이여 서부로 가라”고 하는 말이 유행했고 이는 서부개척정신의 신화를 낳았다.

그 후 나는 공휴일이나 주말이면 이들 가정에서 시간을 보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멜과 오드리 가정은 나의 제2의 가정(second family)으로 불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내가 1979년 6월 어느 날 신부될 사람인 해옥을 소개 했을 때 자신들이 기꺼이 우리 결혼과 피로연을 돕겠다고 했다. 결혼식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Our Father's Luthern Church)에서 하기로 주선했고 피로연(reception)은 자신들 농장의 정원에서 준비하겠다고 했다.

우리의 결혼은 이들이 사는 락포드(Rockford) 마을의 관심을 끌어 이 지역 신문인 크로리버뉴스(Crow River News, September 12, 1979)가 두 장의 큰 사진과 함께 1면 전면을 할애했다.

  ◇ 필자

이상철

중앙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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