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과학기술의 기틀을 다진 ‘과학의 아버지’
中 과학기술의 기틀을 다진 ‘과학의 아버지’
  • 한인희
  • 승인 2009.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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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세계적 물리학자 위안쟈리우<하>

밀리컨교수의 결혼식 주례사는 “두 분은 오늘 이후 살아가시면서 ‘실험이 첫째요, 생활이 두 번째’인 삶을 사세요”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이들 결혼식은 중국의 미사일 전문가인 첸쉐썬(錢學森)이 8미리 영사기로 찍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물리학을 하는 아들 위안웨이썽(Vicent)를 두었고 이들은 이후 55년을 함께 사랑하고 화목한 가정의 모범을  이루었다.
1942년부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했다. 위안쟈리우는 RCA회사의 군수산업분야의 레이더 시설분야에 참여해 연구를 계속했다. 이 레이더는 비행기의 비행고도와 비행기간의 거리를 자동으로 통제하도록 설계되었다. 이로써 민항기와 선박의 안전시스템에 크게 기여했다. 위안쟈리우의 과학적 업적은 미국 국가과학실험실과 프린스턴대학에서 장기간 기초 물리연구를 했다. 그의 학술적 성과는 ‘중성자의 기원’ ‘초전도입자가속기’ ‘공진물리학’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1959년 이후 ‘전미화인협회걸출한성취상’ ‘주미엔지니어협회과학성취상’ 등을 수여받았다.
또한 프랑스, 소련 등지의 유명대학의 방문교수를 역임했고, 중국의 난징대학, 중국과기대학 등 10여개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직을 맡기도 했다. 특히 위안쟈리우는 중국과 타이완의 과학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바가 크다.
중국의 국가지도자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쟝저민 등도 위안쟈리우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는 1973년 중국을 떠난 지 37년 만에 조국의 땅을 밟아보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당시 기자들이 “중국으로 돌아와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난일입니다. 한 국가의 총리를 하시는 분이 너무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시고 세심하고 친절하게 신경써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미국에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들도 조기를 달고 애도했었지요. 이것은 전 세계가 그 분의 인격을 존중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저우총리를 뵙던 날은 1973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막 베이징을 떠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총리께서는 그날 밤 인민대회당에서 저희들을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흥분되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인민대회당의 ‘안훼이팅(安徽廳)’으로 갔습니다. 총리께서는 악수를 하시며 ‘환영합니다. 오늘 제가 두 분을 안훼이팅에서 뵙자고 한 이유를 아세요?’라고 물으셨다. 우리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총리께서는 재미있다는 듯이 ‘우 교수님은 쟝수(江蘇)성 사람이시고, 위안 교수님은 허난(河南) 출신이시고, 안훼이(安徽)는 쟝수성과 허난성 중간에 있기 때문에 제가 안훼이팅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셨어요. 저우총리의 세심한 배려를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날 저녁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밤참을 먹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배석하신 분들은 꿔뭐러(郭沫若), 우요촨(吳有川), 첸쉐썬(錢學森) 등 이었습니다. 저우총리께서는 중미관계와 과학기술발전, 중미과학문화교류, 중국의 대외개방 등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라고 회고했다.
1993년 10월 정식으로 중국의 방사광가속기가 가동이 되었는데 이는 이 분야에서 미국, 유럽,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한 지위를 얻게 되었던 의미가 있었다. 1981년 타이완의 중앙연구원의 원사가 되었다. 그는 제3세대 방사광가속기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고, 이 가속기는 광범한 분야에서 활용되었으며 이 부부의 12년간의 노력 하에 1993년 정식으로 운용되게 되었다. 난징대학 등 4곳의 타이완의 가속기를 사용하는 교류를 하도록 노력했다.
위안쟈리우 부부는 1992년 5월 난징대학 개교 9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들은 80세였고 이달은 때마침 결혼 50주년인 금혼식이기도 했다. 세 가지 기쁜 일이 함께 한 날이었다. 이들 부부는 평생을 서로 사랑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위안쟈리우는 ‘독서광’이었다. 말년에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호사가 책을 읽지 못하게 하자 화를 내고 책을 바닥에 던진 일도 있었다.
위안쟈리우의 평생의 네 가지의 바램이 있었다. 네 가지 모두가 부인 우젠슝과 관련이 있었다. ‘우젠슝·위안쟈리우 과학강좌기금회’와 ‘오중예(吳仲裔)장학금기금회’에 대한 심혈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위안쟈리우는 평생 동안 근검절약해 모든 비용은 이 두 기금회에 사용했다. 그는 매년 국제적으로 저명한 과학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 중국에 초청해 강좌를 개최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도 이 일로 노심초사했다. 그밖에도 난징(南京)에 ‘우젠슝(吳健雄)기념관’을 설립했다. 그 기념관은 우젠슝을 위한 것이었다. 기념관은 많은 과학 자료를 모으고 그의 일생동안의 연구, 서적, 논문 등이 모두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
이 기념관은 중국 내의 젊은 과학자들의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쟝수성의 밍더(明德)학교를 더욱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었다. 밍더학교는 우젠슝의 부친이 설립한 학교였다. 이들 부부는 여러 차례 이 학교에 투자했다. 위안쟈리우는 과학적 사고와 학습은 어릴 때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안쟈리우는 2003년 2월 11일 베이징의 협화의원(協和醫院)에서 서거했다. 향년 91세였다.
먼저 떠난 부인 우젠슝은 1997년 2월 16일 뉴욕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부의 묘지는 쟝수성 타이창(太倉)시의 류허쩐(瀏河鎭)의 밍더학교 교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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