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상대방에 진리는 마인추의 손에…
권력은 상대방에 진리는 마인추의 손에…
  • 한인희
  • 승인 2009.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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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저명한 인구 학자이자 경제학의 태두였던 마인추(하)

침내 마인추는 1957년 7월 5일 그 유명한 ‘신인구론’을 <인민일보>에 발표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구의 증가와 자본축적 간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는 중국인구가 많기 때문에 소비도 크고 자본의 축적도 적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구를 통제해야만 소비도 줄어들고 자본도 크게 축적된다는 점을 주장했다.
둘째, 사회주의를 추진하려면 반드시 노동생산율을 제고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공업을 일으키고 농업을 전산화, 기계화를 해야하지만 인구가 많으면 많은 사람들의 취업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득불 중소형 공업을 신장하는 정책을 추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업도 저효율의 농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로 공업화의 속도가 늦어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셋째, 공업원료와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는 경공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 자본은 축적할 수 있지만 경공업원료의 대부분이 농업에서 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가 많으면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면화, 뽕, 대두, 땅콩 등의 경제작물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동시에 농산품이 수출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수입해야할 많은 중공업 기계 설비를 들여오지 못하면 중공업이 발전시킬 수도 없다고 보았다.
넷째, 전 국민의 토지는 평균 500평도 안되고 대대적인 개간도 단기간에 할 수 없고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인구를 통제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기에 처할 수 있고 특히 정기적인 인구조사도 반드시 실시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마인추의 제안에 대해 마오쩌뚱은 “인구문제를 3년간 시범적으로 실시해보고, 3년 동안 추진한 뒤 4년간 보편적으로 실시하면 가족계획이 가능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마오쩌뚱이 마인추의 제안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인추의 ‘신인구론’이 발표되자 의견이 분분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10여개의 분야에서 인구를 통제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인추가 글을 발표하자 베이징대학에서는 ‘마인추비판좌담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마인추의 주장은 시기적으로 운이 나빴다.
마오쩌뚱이 의욕을 갖고 추진했던 ‘대약진운동’이 실시되면서 인구와 관련된 논쟁이 나타났고 마오쩌뚱의 시각도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간신배였던 캉성(康生)의 등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내에서 캉성과 천바이다(陳佰達)는 마오쩌뚱 개인 숭배에 목숨을 걸었다.
당시 마오쩌뚱의 주구였던 캉성의 지휘 하에 베이징대학에서는 마인추 비판대회가 열기를 뿜었다.
 대자보가 학교와 그가 살고 있던 옌난위엔(燕南園) 36호에도 난무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가득했다. 베이징대학 내의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 비판의 표현은 갈수록 저질스럽게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캉성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비난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 명의로 언론사 책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신인구론’을 비판할 때 마오쩌뚱 주석의 ‘육평백피서(六評白皮書)’를 학습하고 특히 ‘유심주의 역사관의 파산’이라는 글을 탐독해 미제국주의 분자인 애치슨처럼 마인추를 비판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중공의 선전도구였던 <인민일보>, <홍기>잡지, <해방군보>, <문화보>, <중국청년보> 등 주요 언론에서 마인추를 비난하는 글이 무려 200편이 넘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마침내 마인추는 1958년 3월 마인추는 베이징대학의 총장으로 ‘자아비판’의 대자보를 써서 반성했다. 1960년 1월 3일 교육부에 총장직 사직원을 제출했고 모든 직책을 사직하고  전국정협상무위원회 위원의 직위만을 남겼고 이와 동시에 마인추가 글을 발표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렇게 해 8년간의 ‘인구’논쟁은 종료되었다. 마인추는 이때로부터 정치무대와 학술논단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흥미로운 일은 1974년 12월 29일 모택동이 ‘1975년 국민경제계획에 관한보고’를 비준할 때 인구를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주장한 사실이다. 이 발언은 17년 전의 마인추의 ‘신인구론’에서 제기한 3가지 문제와 완전히 일치했다.
따라서 하나의 정책이란 권력자의 개인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참모들의 ‘제안’은 권력자의 ‘판단’과는 거리가 있으며 이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권력추구에 숨겨진 부분이라는 점을 다시한번 인식하게 된다.  
마오쩌뚱에 의해 ‘숙청’당했던 마인추는 떵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한 가정 한 아이 낳기(一胞胎)’ 정책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79년 당 중앙이 정식으로 복권시켜주었고, 2년 뒤 아시아의원연맹 인구와 발전회의에서 인구문제에 대한 공로로 그를 표창하기도 했다.
1982년 5월 10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이는 “마인추 한사람을 비판하자 3억 인이 더 태어났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또한 재미있는 일은 인구를 줄이자고 주장했던 마인추가 아이는 7명이었다는 점이다.
1999년 3월 17일 <중화독서보(中華讀書報)>에 주빠오친(朱寶琴)이 쓴 글에는 1901년에 결혼한 마인추의 첫 번째 부인인 장퇀메이(張團妹)와의 사이에 3남 1녀(아들은 이후에 사망)를 두었고, 1917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고향에서 당시 13살이었고 마인추와 22살 차이가 났던 왕중정(王仲貞)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낳았다.
결국 2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두었는데 신문화 운동으로 유명한 후쓰(胡適)선생은 마인추가 여색을 좋아했다는 밝혔다. 다행이도 두 부인 사이도 원만했다.
중국 현대사에 걸출한 인물이었던 마인추는 100세까지 살았다. 그는 60세에 최고 권력자 장제스(蔣介石)에 저항했고, 80세에는 캉성(康生)과 싸웠다.
 그러나 배후에는 최고 권력자 마오쩌뚱이 있었다. 이 두 번의 투쟁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권력은 모두 상대방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진리는 마인추의 수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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